책 소개
■ 작가의 말
글자를 읽어야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글씨를 끄적이면 허무하지 않았다. 글자가 세상을 이루는 근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곰곰 따져 보았더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아버지의 명령으로 날마다 글자를 한 바닥씩 써야 했다. 아버지가 내민 종이는 넓었다. 그 종이를 무조건 글자로 채워 넣어야 했다. 교과서를 베끼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글자를 나열해서 문장을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저녁마다 숙제를 검사했다. 그때만 아버지가 무서웠다.
이런 일은 일어나면 안 되는 거잖아? 이웃 어른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 그 일을 세상에 알려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사건을 공책에 낱낱이 기록했다. 이사를 하면서 공책을 잃어버렸다. 어른이 되어서 또 다른 불행한 사건을 보았다. 전동 타자기로 그 일을 기록했다. 그 글은 세상에 알려졌다. 그들이 반성을 하고,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나를 공격했다. 떼로 몰려와서 나를 비난했다. 한 차례 지나가는 소낙비쯤으로 여겼어야 했다.
문학은 내게 어울리는 장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을 고치고 싶은 바람은 여전했다. 기사를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문 쓰기는 내 기질과 성격과도 썩 어울릴 것 같았다. 만약 기자가 되었더라면 괜찮은 기사를 많이 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세상을 자꾸 살아 보니까 기자가 안 된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기자가 되었더라면 굉장히 후회했을 것이다. 기자도 마음대로 기사를 쓸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은 파도치는 물결과 같다고 한다. 물결이 출렁일 때는 어떤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직장에서 뒤늦게 물러나 주위가 고요해지면서 비로소 번잡스런 세상과 휘청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오롯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가 바꾸어야 할 세상도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도 이미 없었다. 오래전 나를 잊어버렸을 이들을 나 혼자 붙잡고 싸우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바보였구나, 중얼거리고는 지난날들을 몽땅 훌훌 털어버리려 애를 썼다. 내 안에 고여 있던 많은 것들을 흘려보냈다. 그런데 글쓰기는 여운처럼 남아 나를 떠나지 않았다.
글자는 아직도 나에게 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도구이다. 일찍 접었던 글쓰기에 다가가 두 번째 소설집을 내게 되었다. 세상에 내놓을 만한 글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소설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글쓰기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 지인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따듯한 손길을 내밀어 준 아우에게 고맙다. 다시 소설집을 낼 수 있게 되었을 때 또 하나 기뻐할 이유는 그것이었다. 아우들에게 고맙다.
2023년 여름날 최임순
작가 소개
최임순
인천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외출」이 당선되었다. 소설집 『바다 건너 그곳』, 『서해 먼 섬』이 있다.
목 차
작가의 말 – 5
위험한 수업 – 12
전선에서 살아남기 – 44
서해 먼 섬 – 72
이웃 – 100
크림빵과 강아지 – 130
재개발 지역 탈출기 – 158
사진을 찍는 이유 – 192
망가진 핸드폰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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