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1
1985년 처음 시집 『어부 김판수』를 내면서 박기동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의 삶에 고통이 따른다면 서투른 희망으로 이 고통이 잊혀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희망은 아편과 같은 것이 아닐 테니까. 고통과 희망 사이에서 헤매어 보는 것이 차라리 값진 것이리라.”
박기동 시인의 이런 진술은 단지 그의 시집에만, 그의 글쓰기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문학은 해법을 제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는 행위에 가깝기 때문이다. 문학은 임시방편의 치유가 아니라 완전한 치유를 위해 더 심한 병증을 앓는 행위에 가깝기 때문이다.
시집 『어부 김판수』는 그러니까 1980년대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어떤 병증들을 시인 자신이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모습을, 1980년대 우리 사회가 가졌던 고통과 희망 사이를 시인 자신이 오체투지로 온몸을 끄-을-고 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
시집 『어부 김판수』는 몇 개의 연작시가 눈에 띤다. ‘어부 김판수’로 시작하는 일련의 시편들, ‘동굴시편’, ‘묵호시편’ 그리고 ‘춘천시편’이 그것이다. 그 시편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어떤 공간과 그 공간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공간은 작게는 시인 자신이 실제 살았던 공간이지만 크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혹은 우리가 살았던 공간이다. 어부 김판수의 공간이 강릉의 안목을 보자. 그곳은 어부 김판수가 역시 어부였던 아들이 바다에 나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공간이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 중 하나가 아니던가. 그곳은 고(苦)의 공간과 시간이다. 동굴시편에서 그리고 있는 동굴은 어떤 곳인가. 죽음과 어둠의 공간이다. 묵호시편에서 묵호라는 공간은 어떤가. 보이지 않는 바람이 폭풍이 되고 태풍이 되는 곳. 짐승들의 비명소리만 자욱한 곳. 세상의 모든 본적들이 몰려와 바람 앞에 촛불이 되어 펄럭이는 곳이다. 춘천시편에서 보여주고 있는 공간은 또 어떤가. 그곳은 강의 가장 밑바닥이고 땅의 맹장 부근이다. 그곳은 미망의 공간이고 어두워지는 공간이다.
다시 한번 박기동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의 삶에 고통이 따른다면 서투른 희망으로 이 고통이 잊혀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희망은 아편과 같은 것이 아닐 테니까. 고통과 희망 사이에서 헤매어 보는 것이 차라리 값진 것이리라.” 그러니까 그가 시집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현실이라는 암울한 공간, 그 고통과 희망 사이를 독자들도 헤매어 보라는 것이 아닐까. 서투른 희망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직시하고 고통에 몸을 던지는 것. 그것이 치유의 시작이라는 것. 시인이 말하고 싶은 궁극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그는 사람 사는 길 위에 엎드린 것이겠다.
지난밤에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바닷가에 가 보았다.
감청 빛의 파도 그 하얀 이마
바다의 안색은 태연했다.
튀어 오른 얼치기 몇 마리가
잘못 살았다고 죽는 시늉이다.
얼치기의 삶 얼치기의 길
길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서나
사라진다.
무엇보다 그리운
사람 사는 길 위에 엎드렸다.
- 「무엇보다 그리운」 전문
3
1985년 당시 이 시집을 출간한 민족문화사 한국시인총서 편집동인은 발간의 이유를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논리와 이론,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실증적인 것만이 존중되고 이야기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비논리적이며 또 무엇으로도 이야기할 수 없는 詩라는 예술의 숲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므로, 그 숲 속에서 누구에게도 빛이 될 수 있는 램프를, 그 램프의 심지를 가장 조심스럽게 돋우기 위하여 우리는 노력했었다. 직관과 감성, 그러한 것으로 도달되는 진리의 자리에 이 땅의 보다 빛나는 詩의 진실을 가장 떳떳이 보이고자 하는 이들을 우리는 초대하기로 했다.” 32년이 지난 지금도 이 시집은 ‘詩라는 예술의 숲’이 어떤 곳인지, ‘빛나는 詩의 진실’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시집이다.
해설 중에서
박기동의 『어부漁夫 김판수』는 삶의 길에서 체험하고 꿈꾸는 세계를 노래하는 일이 시인의 고유한 과제라는 그 나름의 자각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시집이다. 그의 시편들은 순수한 자아의 실현을 억압하는 속악한 일상성에 대한 괴로운 자기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시인은 그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을 절제된 언어로 되풀이하여 노래하고 있다. 시인을 억압하는 현실적 조건은 작품 속에서 어둠·동굴·터널·땅속 등의 어두운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는데, 그의 시들은 이 어두움 속에서 태어나고 그 속으로 돌아온다.
- 서준섭(문학평론가)
작가 소개
저 : 박기동
1953년 강원도 명주군(현 강릉시) 왕산면에서 태어났으며 강릉고와 강원대학교 및 동 교육대학원(체육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1982년 『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부漁夫 김판수』, 『내 몸이 동굴이다』, 『다시, 벼랑길』, 『나는 아직도』 등이 있다. 현재 강원대학교 스포츠과학부 교수이다.
목 차
시인의 말 1985
1부
다시 애굽으로
모과 혹은 춤
새벽 송
1984. 가을
바람
숫돌
별
징검다리
돌멩이가 일어나 하는 말이
어부 김판수의 우물
어부 김판수의 산책
어부 김판수의 술
어부 김판수의 길
어부 김판수의 꿈
어부 김판수의 가슴
어부 김판수의 메아리
길 떠난 어부 김판수
2부
동굴시편 · 1 ― 죽어가는 바다
동굴시편 · 2 ― 야곱의 뼈
동굴시편 · 3 ― 깨어남에 대하여
묵호시편 · 1 ― 폭풍주의보
묵호시편 · 2 ― 비 오는 날의 드뷔시
묵호시편 · 3 ― 우글우글
묵호시편 · 4 ― 본적지
묵호시편 · 5 ― 가오리
묵호시편 · 6 ― 생물
벌판
바다에도 산죽밭이 피어나
풀잎 씹는 자여
봉평 가는 길
혹
발목
새벽이슬
무엇보다 그리운
3부
모일
귀가
입춘
대낮에 우는 개구리는
버섯
두더지
강물에게
회오리바람
삼우제
삼복
두통
북어
시
서정리
예감
초당
개·1
개·2
개·3
개·4
4부
춘천시편 · 1 ― 효자동
춘천시편 · 2 ― 미망의 딸
춘천시편 · 3 ― 다만 떨고 있는 것은
정선의 강
회신곡
장욱진·1
장욱진·2
산죽 그늘 아래
콘체르토
조화
피리 소리
퉁소
한곳에 머물기
산의 문을 열 때는
해바라기의 승천
스물일곱 번째의 해가 뜬다
오늘은 바다를 향하여
그대 가슴에 촛불 하나
해설 서준섭
사람이 사는 길 위의 시―박기동의 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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