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남주희 시인의 시를 읽으면 콜라주 기법으로 그린 그림, 혹은 칸딘스키의 추상화가 떠오른다. 모든 예술작품은 대상세계(universe)를 그리는 일이다. 시는 언어로 세계를 그리고 그림은 색채와 선으로 세계를 그린다. 작품과 세계가 멀어질수록 추상에 가깝다. 그런 관점에서 남주희의 시는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대상세계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가령“ 농담으로 열기를 붓질한”이란 시구에서 ‘열기’라는 말과 호응되는 서술어는 감각어일 것이나 ‘붓질한’이라는 동사와 결합한다. “어둠을 저음처리 하는”도 같은 맥락의 언어 사용이다. 어둠이라는 색채 이미지가 저음이라는 청각 이미지로 변주된다. 서로 이질적인 언어가 결합함으로써 폭력적 이미지(radical image)를 만들고 이 폭력적 이미지는 독자에게 낯설게 다가갈 수 있지만 시를 역동적이게 한다.
수천 개의 그리운 화석들이 꽃무릇처럼 피고
나는 저 밑바닥 가장자리쯤에서 생후 처음 듣는 울음의
진원지를 수소문해야 한다
몇 폭의 몸뚱어리가 바트게 접질러진 위로
생이란 생은 모두 바래지며 하얗게 건너가고 있다
오랜 정인에게 띄우는 전갈도 이렇게 백지장처럼 창백
할까
어둠을 끄는 듯 끌려가는 휜 노인
풍장처럼 바래지며 천 개의 소금꽃을 따고 있다
-「소금꽃」 부분
소금꽃의 사전적 풀이는 염전에서 소금이 엉키는 모양 혹은 땀이 증발하고 남은 소금의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시인이 호출한 어휘는 하필 소금꽃이어야 하는가? 꽃의 보편적 상징은 생명이나 탄생과 같은 생물학적 이미지와 관련된다. 소금꽃은 무생물이다. 이로 미루어 시인이 호출한 소금꽃은 생명이 없다는 데 방점이 주어진다. 시인의 시선이 가닿은 쪽은 생성 쪽이 아니라 소멸 쪽이다. “한 생이 저리도 눈부셔도 되는가”라는 물음은 물음이라기보다 소멸의 이름다음에 대한 경탄이라 할 수 있다.
손가락이 채워진 금반지 틈을 노리고 저녁을 옮기는 착한 지하철 무심하게 통과한다 나무와 전신주가 입을 깨물고 유리창에 덤빈다 싹수가 노란 관리대상 품목에 죽자고 들러붙는다 노회한 자루 속을 들락거리다 귀가 닳은, 꽃제비의 눈웃음이 오후 쪽으로 빠지고 빌어먹을 얼굴 한 칸 뒤적여보니 속눈썹이 중고(中古) 같다 배달된 인상은 에오라지 팽 당한, 벌레이다
-「눈웃음」 전문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호모사피엔스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면에서 우수한 것은 아니다. 그런 호모사피엔스로서의 몇 가지 특성을 제외하면 사람은 다른 동물에 비해 오히려 열등한 면이 많다. 시인은 ‘눈웃음’을 통해서 겉으로 보기에 우아한 만물의 영장이라는 외면 뒤에 숨은 수컷의 적나라한 모습을 풍자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시인의 말
안경 도수를 높이니 사물의 구도가 깨진다.
희미하고 우울한 것에 편들지 못해
몸이 가렵다.
겹쳐 보이는 시의 면적에 눈을 얹는다.
저녁 순정을 받아 쓴 일기 52편을 펼친다.
어둑살이 드리우니 낮은 것의 속내가 명징해진다.
나를 오래 들여다볼 수 있어 좋다.
2017년 10월
남주희
작가 소개
저 : 남주희
대구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2003년 [시인정신] 신인상, [현대수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둥근 척하다』 『오래도록 늦고 싶다』 『길게 혹은 스타카토로』 『꽃잎호텔』, 산문집 『조금씩 자라는 적막』이 있다. 지식경제부 장관상, 김우종문학상 본상, 한국민족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대구문화방송 아나운서로 오랫동안 재직했으며, 영남일보에 칼럼을 연재한 바 있다. 대한민국 미술협회 회원.
목 차
시인의 말
제1부
소금꽃 13
고백을 품다 14
어둠을 편애하다 16
느긋한 움직임 18
메리 크리스마스 20
불화와 마주앉다 22
당부 24
그늘을 옮기다 25
바람을 비틀다 26
무한정 취하다 28
남은 어둠 30
잠깐, 수작을 32
허술한 울음 34
속초, 혹은 배경 36
낙화의 시간 38
야반도주 40
환청 42
청춘열차 44
제2부
눈웃음 47
물컹 48
방생 50
제비꽃은 오지 않았다 52
밤참을 굽다 54
리모컨의 배후 56
왁자한 몸짓 58
우두커니 60
동여매다 62
꽉 찬 저녁 64
송구한 눈물 66
어둠을 분양하다 68
노동의 사생활 70
귀가 72
더러 당신인 듯한 74
빈방을 경험하다 76
돼지국밥 집에서 78
수컷들의 행위 80
제3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83
누추한 잠 84
시나브로, 여름 끝 86
슬픈 잠 88
말랑한 순산 90
반구대 암각화 92
유효기간 94
어둠 칸칸 96
갑상선 종양 98
짭조름한 몸 100
참 아득한 연애 102
그대라는 말 103
충실한 소문 104
무게 106
어쨌든 봄밤 108
안주 한 접시 110
바람 부는 날 112
해설 | 역동적 언어의 미학 113
권서각(시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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