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빈방이 많아 사는 게 이렇게 매일매일 허전하고 허망한 줄 알면서도 남에게 내줄 빈방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빈방이라면 잠긴 방과 무엇이 다르리까.”
죄 없는 고통 앞에서 인간은 ‘왜’를 묻는다. ‘왜 하필 나인가?’ ‘이런 끔찍한 일은 왜 벌어지는가?’ ‘신은 왜 이런 부조리를 눈감는가!’ 고故 박완서 작가 또한 그랬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누구보다 아름답게 살아낸 친구의 죽음이나 숱한 사람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대형 참사 앞에서 그는 극심한 분노와 의혹에 시달리고, 다리 없는 몸을 바닥에 끌며 구걸하는 이의 찬송을 들으면서는 “주님, 저 불쌍한 이한테까지 찬양을 받으셔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너무 잔인하십니다.”라며 원망하기까지 한다.
스스로를 “차가운 이기주의자”라 칭한 박완서 작가는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천주교 『서울주보』에 그 주일의 복음을 묵상하고 쓴 ‘말씀의 이삭’과 이를 엮어낸 산문집 『빈방』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제가 예수에게…사로잡혔다고는 하나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었습니다. 이건 분명히 위선일 것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위선을 까발리기 위해서 성서를 통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서를 읽는 동안 작가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토록 냉랭하게 말할 것은 없지 않느냐, 귀신 들린 딸을 구해달라는 여인에게 그렇게 야박하게 구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예수께 따지고 든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산상수훈에 대해서도 그랬다. “예수님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의 옹호자로 오신 것은 알겠지만 마음까지 가난하라니요?…그건 당신이 일관되게 설하신 사랑이나 나눔의 정신과도 앞뒤가 안 맞아 더욱 혼란스럽습니다.”라며 의문을 표한다. “가난한 마음이란 혹시 빈자의 창고처럼 열린 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 끝에 그는 가난한 마음이란 곧 “겸손한 자유인”을 뜻함을 스스로 깨친다.
박완서 작가는 의심했기에 오히려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예수의 사랑을 『빈방』을 통해 증언한다. 이불을 널다 발견한 봄날 들꽃에서 부활을, 지하철역 앞에서 떡을 파는 아주머니의 옷깃에 달린 어버이날 종이꽃에서 생명을 목격하며, 일 못하는 파출부가 남기고 간 일거리를 기쁨으로 정돈하는 친구에게서 예수와도 같은 연민의 정을 발견한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성서 속 예수의 행적을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읽고 고민한 끝에 작가는 인간의 의지를 정련하는 생의 고난이 곧 신의 사랑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비극 앞에서조차 보다 견결해지고야 만다.
“당신의 시신을 지상으로 내려서 널 위에 뉘었을 때 피 묻고 찌그러지고 너덜너덜해진 당신의 육신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의 극치군요.…그걸 피하지 못했으니 당신은 철두철미 인간이었고, 그걸 피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정말로 인간도 아니군요. 당신의 참혹한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느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는 그닥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란 바로 제 자식도 이렇게 죽일 수 있는 아버지, 엄혹 그 자체라는 깨달음이 전율처럼 등줄기를 스쳤습니다.”
“저를 향해 굳게 문 닫고 있다 해도 가끔 그들 사이로 돌아와 바람처럼 공기처럼 스며들어 그들과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1998년, 박완서 작가는 서울시 잠실동 아파트에서 구리시 아치울 노란집으로 이사한 후 “보이지 않는 손길”을 더욱 가깝게 느낀다. 다음 해 ‘말씀의 이삭’ 중 94편을 묶은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가 출간됐으며, 2006·2008년의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은 그 개정판이다. 『빈방』은 세 번째 개정판이자 첫 번째 증보판으로, 미수록 원고 5편을 새로이 찾아 넣고 『노란집』의 일러스트를 그린 이철원 작가의 그림을 더해 박완서 작가의 정신세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각 꼭지는 연재 순서를 그대로 지켜 실었다. 때문에 책 초반에는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어야 하”는 소금이 되는 것도, 제 몸을 태워야 세상을 비출 수 있는 “빛이 되는 것도 사양하겠습니다.”라던 그가 3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살아생전에나 사후에나 누구라도 “바람처럼 공기처럼 스며들어” 쉬어갈 수 있는 빈방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박완서 작가에게 성서-예수를 이해하는 일은 곧 삶의 이치와 자연의 섭리를 알아가는 일이었다. “오십이 넘어서 가톨릭 신자가 되었는데도…너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였던 게 아닌가.” 했던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그는 백화점에선 암말 않으면서 노점에서는 깎아달라 조르는 자신을 “죄인 중에도 가장 얼굴 가죽 두꺼운 죄인”이라 나무라며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부끄러움이 뭔지 깨닫게 하소서.”라고 기도했고, 성서 속 예수와 같이 소박한 식사를 나눔으로써 모든 생명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자리를 꿈꾸었다. 연민과 사랑, 그리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겸허한 마음으로 써 내려간 『빈방』은 노년기 박완서 작가의 내밀한 고백이자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신과 인간에게 올리는 헌사다.
▣ 작가 소개
저 : 박완서
경기도 개풍(현 황해북도 개풍군) 출생으로,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이주했다. 1944년 숙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교사였던 소설가 박노갑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작가 한말숙과 동창이다. 1950년 서울대학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전쟁으로 중퇴하게 되었다. 개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박완서에게 한국전쟁은 평생 잊을 수 없을 없는 기억이다.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부상을 입고 거의 폐인이 되어 돌아온 `똑똑했던` 오빠가 `이제는 배부른 돼지로 살겠다`던 다짐을 뒤로 하고 여덟 달 만에 죽음을 맞이하고, 그후 그의 가족은 남의 물건에까지 손을 대게 되는 등 심각한 가난을 겪는다.
그후 미8군의 PX 초상화부에 취직하여 일하다가 그곳에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다. 1953년 직장에서 만난 호영진과 결혼하고 살림에 묻혀 지내다가 훗날 1970년 불혹의 나이가 되던 해에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裸木)』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 이후 우리의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까지 뼈아프게 드러내는 소설들을 발표하며 한국 문학의 한 획을 긋고 있다. 박완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에 적절한 서사적 리듬과 입체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다채로우면서도 품격 높은 문학적 결정체를 탄생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작가는 우리 문학사에서 그 유례가 없을 만큼 풍요로운 언어의 보고를 쌓아올리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그녀는 능란한 이야기꾼이자 뛰어난 풍속화가로서 시대의 거울 역할을 충실히 해왔을 뿐 아니라 삶의 비의를 향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구도자의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
한국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다룬 데뷔작 『나목』과 『목마른 계절』『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아저씨의 훈장』『겨울 나들이』『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을 비롯하여 70년대 당시의 사회적 풍경을 그린 『도둑맞은 가난』『도시의 흉년』『휘청거리는 오후』까지 저자는 사회적 아픔에 주목하여 글을 썼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부터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작가는 행복한 결혼은 어떤 형태인가를 되묻게 하는 소설인 『서 있는 여자』『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 점점 독특한 시각으로 여성문제를 조명하기 시작한다. 또 장편 『미망』『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에서는 개인사와 가족사를 치밀하게 조명하여 사회를 재조명하기도 한다.
『배반의 여름』은 1975년 9월에서 1978년 9월까지 발표했던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조그만 체험기」「흑과부黑寡婦」「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등에서 볼 수 있듯이 박완서가 그리는 모성의 힘은 실로 놀랍다. 성균관대에서 열린 ‘2006 호암상 수상자(예술상) 초청 강연회’에서 박완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 문학의 뿌리는 어머니”라고. 박완서 특유의 수다스러움으로 풀어내는 모성의 힘은 힘센 것들만이 권력을 쥐고 판을 치는 현대산업사회에서 뒤로 처진 자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위무해준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는 1987년 1월에서 1994년 4월까지 발표되었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가족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 네 개나 있는데 그중「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남편의 죽음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아들의 죽음을 담고 있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특이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체로 되어 있는데 담담하게 이어가는 주인공의 목소리에서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저녁의 해후』에는 1984년 1월부터 1986년 8월까지 발표했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해산바가지」「애 보기가 쉽다고?」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에서 나타나는 하층민들의 인간애는 가진 자들의 야만성과 대비되어 더욱 빛을 발한다.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은 1979년 3월에서부터 1983년 8월까지 발표한 작품들을 수록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속물성과 위선이 난무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진다. 젊은 것들의 무관심과 조롱 속에서 외롭게 늙어가는 노인들의 모습을 담아낸 「황혼」「천변풍경泉邊風景」과, 출세한 자들의 허위를 그린 「내가 놓친 화합(和合)」「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 등이 그것이다.
『미망』은 조선조 말기에서 6ㆍ25 전쟁 직후까지 그 파란만장했던 시대를 한 개성 상인의 가족사를 통하여 재창조한 대하소설이다. 민족의 수난사와 더불어 고난과 격동의 시대를 험준한 산을 넘듯 숨가쁘게 살아온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박완서 소설 문체가 도달한 궁극적인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작가는 사람과 자연을 한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느낀 기쁨과 경탄, 감사와 애정을 담아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펴냈다. ‘친절한 책읽기?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연재했던 글도 함께 실어 노작가의 연륜과 성찰이 돋보이는 글을 선보였다.
1993년부터 국제연합아동기금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1994년부터 공연윤리위원회 위원, 1988년부터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으로 한국문학작가상, 『엄마의 말뚝』으로 제5회 이상문학상 『미망』으로 대한민국문학과 제3회 이상문학상 『꿈꾸는 인큐베이터』로 제38회 현대문학상 등을 받았다. 2006년, 문화예술인으로서 처음이자 여성으로서도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평소 입버릇처럼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고 고백해왔던 그녀는 전쟁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경험으로 글을 써왔다. 여러 편의 장편소설과 수필집, 동화집을 발표하고, 2010년 8월 수필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마지막으로 2011년 1월 22일, 담낭암 투병 중 별세했다. 경기 구리시에는 ''박완서 문학마을''이 조성될 예정이다.
그림 : 이철원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단국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노란집』 『우리가 어느 별에서』 『역사신문』 『길 위에 시간을 묻다』 『성경 익스프레스』 등의 단행본에 그림을 그렸고, 단편 애니메이션 〈Cloy〉 〈왕과 화가〉를 제작했다. 현재 『조선일보』 미술팀에서 일하고 있다.
▣ 주요 목차
책을 펴내며 7
들어가지 않고는 나올 수도 없는 문
우리 안에 공존하는 동방박사와 헤로데 17│복된 첫사랑의 추억 20│부르는 소리 있어… 23│이의 없습니다 27│차라리 해바라기가 되게 하소서 30│두 번 못 박긴 싫습니다 33│아아, 그렇군요 36│주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39│고고한 은둔에의 유혹 43│놀랍고 황홀한 순간 46│그 말씀만은 도저히 못 알아듣겠습니다 49│주님도 편애를 하시나요 52│최초의 크리스트 세일즈맨 55│은행나무보다 큰 봄까치꽃 58│에미 마음, 여자 마음 61│미처 알아보지 못한 만남들 64│들어가지 않고는 나올 수도 없는 문 67│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70│참으로 좋은 달 73│눈물 그렁한 당신의 시선 76│당신의 상흔을 알아보게 하소서 80│아이고, 하느님. 그것만은 못 하겠습니다 83│축복받은 첫 영성체 86│돌아오라, 다시 한 번 89│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92│숨을 곳을 모르겠나이다 95
이 고해에서 익사하지 않은 까닭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101│서 말의 구슬보다 한 톨의 씨앗으로 족하게 하소서 104│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싶은 근원적 물음 108│측은지심 111│이 고해에서 익사하지 않은 까닭 114│에미의 마음 117│예수님의 사랑법 120│헤아릴 길 없는 신비 124│내 이름으로 모인 곳 127│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130│주님의 잣대 133│말과 행동 136│내 친구 이야기 139│어떤 교만 142│빈 무덤 145│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148│최초의 경이 151│다양해서 아름다운 세상 154│가장 부끄러운 고백 157│산타 할아버지 160│외치는 소리 164│어느 중년 가장의 고백 167│두들겨 깨우소서 170│영광과 고통 173
순명의 아름다움
별을 보여주세요 179│길 182│부르시는 방법 185│말의 힘 189│우울한 전망 192│외딴곳 195│광야 198│아름다운 시절 201│우리에게 평화를 204│두려운 자유 208│빈방 211│공과 사 214│주여, 저희들을 쟁기질하소서 217│우리의 소원 220│예수님의 변덕 223│정보의 안개 226│잔인한 여름 230│우리 모두 돌아가야 할 곳 233│소금과 부패균 236│꽃보다 아름다운 계절 239│가난한 사람은 우리의 쓰레기통이 아니다 242│도망칠 수 없는 당신 245│주님, 어서 오소서 248│저희 마음에 요한을 보내주소서 252│지도자에게 겸손을 255│순명의 아름다움 258│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 26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언
선입관에 대하여 267│예수님의 미끼 270│자화상 273│나의 안과 밖 276│바위를 이기는 건 물뿐 279│내가 꿈꾸는 부활 282│궁금한 예수님의 얼굴 285│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언 288│우리가 구해야 할 기적 292│아빠라고 부르고 싶은 주님 295│우리는 야단맞아 쌉니다 298│또 하나의 기회 301│주님의 양면성 304│좁은 문은 지속적 관심 307│염량세태 310│당신의 종 313│신의 겸손 316│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 319│자비심 324│회개와 행동 327│요한의 의심 330│경천애인 333
“빈방이 많아 사는 게 이렇게 매일매일 허전하고 허망한 줄 알면서도 남에게 내줄 빈방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빈방이라면 잠긴 방과 무엇이 다르리까.”
죄 없는 고통 앞에서 인간은 ‘왜’를 묻는다. ‘왜 하필 나인가?’ ‘이런 끔찍한 일은 왜 벌어지는가?’ ‘신은 왜 이런 부조리를 눈감는가!’ 고故 박완서 작가 또한 그랬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누구보다 아름답게 살아낸 친구의 죽음이나 숱한 사람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대형 참사 앞에서 그는 극심한 분노와 의혹에 시달리고, 다리 없는 몸을 바닥에 끌며 구걸하는 이의 찬송을 들으면서는 “주님, 저 불쌍한 이한테까지 찬양을 받으셔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너무 잔인하십니다.”라며 원망하기까지 한다.
스스로를 “차가운 이기주의자”라 칭한 박완서 작가는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천주교 『서울주보』에 그 주일의 복음을 묵상하고 쓴 ‘말씀의 이삭’과 이를 엮어낸 산문집 『빈방』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제가 예수에게…사로잡혔다고는 하나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었습니다. 이건 분명히 위선일 것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위선을 까발리기 위해서 성서를 통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서를 읽는 동안 작가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토록 냉랭하게 말할 것은 없지 않느냐, 귀신 들린 딸을 구해달라는 여인에게 그렇게 야박하게 구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예수께 따지고 든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산상수훈에 대해서도 그랬다. “예수님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의 옹호자로 오신 것은 알겠지만 마음까지 가난하라니요?…그건 당신이 일관되게 설하신 사랑이나 나눔의 정신과도 앞뒤가 안 맞아 더욱 혼란스럽습니다.”라며 의문을 표한다. “가난한 마음이란 혹시 빈자의 창고처럼 열린 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 끝에 그는 가난한 마음이란 곧 “겸손한 자유인”을 뜻함을 스스로 깨친다.
박완서 작가는 의심했기에 오히려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예수의 사랑을 『빈방』을 통해 증언한다. 이불을 널다 발견한 봄날 들꽃에서 부활을, 지하철역 앞에서 떡을 파는 아주머니의 옷깃에 달린 어버이날 종이꽃에서 생명을 목격하며, 일 못하는 파출부가 남기고 간 일거리를 기쁨으로 정돈하는 친구에게서 예수와도 같은 연민의 정을 발견한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성서 속 예수의 행적을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읽고 고민한 끝에 작가는 인간의 의지를 정련하는 생의 고난이 곧 신의 사랑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비극 앞에서조차 보다 견결해지고야 만다.
“당신의 시신을 지상으로 내려서 널 위에 뉘었을 때 피 묻고 찌그러지고 너덜너덜해진 당신의 육신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의 극치군요.…그걸 피하지 못했으니 당신은 철두철미 인간이었고, 그걸 피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정말로 인간도 아니군요. 당신의 참혹한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느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는 그닥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란 바로 제 자식도 이렇게 죽일 수 있는 아버지, 엄혹 그 자체라는 깨달음이 전율처럼 등줄기를 스쳤습니다.”
“저를 향해 굳게 문 닫고 있다 해도 가끔 그들 사이로 돌아와 바람처럼 공기처럼 스며들어 그들과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1998년, 박완서 작가는 서울시 잠실동 아파트에서 구리시 아치울 노란집으로 이사한 후 “보이지 않는 손길”을 더욱 가깝게 느낀다. 다음 해 ‘말씀의 이삭’ 중 94편을 묶은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가 출간됐으며, 2006·2008년의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은 그 개정판이다. 『빈방』은 세 번째 개정판이자 첫 번째 증보판으로, 미수록 원고 5편을 새로이 찾아 넣고 『노란집』의 일러스트를 그린 이철원 작가의 그림을 더해 박완서 작가의 정신세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각 꼭지는 연재 순서를 그대로 지켜 실었다. 때문에 책 초반에는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어야 하”는 소금이 되는 것도, 제 몸을 태워야 세상을 비출 수 있는 “빛이 되는 것도 사양하겠습니다.”라던 그가 3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살아생전에나 사후에나 누구라도 “바람처럼 공기처럼 스며들어” 쉬어갈 수 있는 빈방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박완서 작가에게 성서-예수를 이해하는 일은 곧 삶의 이치와 자연의 섭리를 알아가는 일이었다. “오십이 넘어서 가톨릭 신자가 되었는데도…너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였던 게 아닌가.” 했던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그는 백화점에선 암말 않으면서 노점에서는 깎아달라 조르는 자신을 “죄인 중에도 가장 얼굴 가죽 두꺼운 죄인”이라 나무라며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부끄러움이 뭔지 깨닫게 하소서.”라고 기도했고, 성서 속 예수와 같이 소박한 식사를 나눔으로써 모든 생명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자리를 꿈꾸었다. 연민과 사랑, 그리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겸허한 마음으로 써 내려간 『빈방』은 노년기 박완서 작가의 내밀한 고백이자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신과 인간에게 올리는 헌사다.
▣ 작가 소개
저 : 박완서
경기도 개풍(현 황해북도 개풍군) 출생으로,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이주했다. 1944년 숙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교사였던 소설가 박노갑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작가 한말숙과 동창이다. 1950년 서울대학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전쟁으로 중퇴하게 되었다. 개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박완서에게 한국전쟁은 평생 잊을 수 없을 없는 기억이다.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부상을 입고 거의 폐인이 되어 돌아온 `똑똑했던` 오빠가 `이제는 배부른 돼지로 살겠다`던 다짐을 뒤로 하고 여덟 달 만에 죽음을 맞이하고, 그후 그의 가족은 남의 물건에까지 손을 대게 되는 등 심각한 가난을 겪는다.
그후 미8군의 PX 초상화부에 취직하여 일하다가 그곳에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다. 1953년 직장에서 만난 호영진과 결혼하고 살림에 묻혀 지내다가 훗날 1970년 불혹의 나이가 되던 해에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裸木)』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 이후 우리의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까지 뼈아프게 드러내는 소설들을 발표하며 한국 문학의 한 획을 긋고 있다. 박완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에 적절한 서사적 리듬과 입체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다채로우면서도 품격 높은 문학적 결정체를 탄생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작가는 우리 문학사에서 그 유례가 없을 만큼 풍요로운 언어의 보고를 쌓아올리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그녀는 능란한 이야기꾼이자 뛰어난 풍속화가로서 시대의 거울 역할을 충실히 해왔을 뿐 아니라 삶의 비의를 향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구도자의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
한국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다룬 데뷔작 『나목』과 『목마른 계절』『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아저씨의 훈장』『겨울 나들이』『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을 비롯하여 70년대 당시의 사회적 풍경을 그린 『도둑맞은 가난』『도시의 흉년』『휘청거리는 오후』까지 저자는 사회적 아픔에 주목하여 글을 썼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부터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작가는 행복한 결혼은 어떤 형태인가를 되묻게 하는 소설인 『서 있는 여자』『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 점점 독특한 시각으로 여성문제를 조명하기 시작한다. 또 장편 『미망』『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에서는 개인사와 가족사를 치밀하게 조명하여 사회를 재조명하기도 한다.
『배반의 여름』은 1975년 9월에서 1978년 9월까지 발표했던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조그만 체험기」「흑과부黑寡婦」「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등에서 볼 수 있듯이 박완서가 그리는 모성의 힘은 실로 놀랍다. 성균관대에서 열린 ‘2006 호암상 수상자(예술상) 초청 강연회’에서 박완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 문학의 뿌리는 어머니”라고. 박완서 특유의 수다스러움으로 풀어내는 모성의 힘은 힘센 것들만이 권력을 쥐고 판을 치는 현대산업사회에서 뒤로 처진 자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위무해준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는 1987년 1월에서 1994년 4월까지 발표되었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가족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 네 개나 있는데 그중「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남편의 죽음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아들의 죽음을 담고 있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특이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체로 되어 있는데 담담하게 이어가는 주인공의 목소리에서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저녁의 해후』에는 1984년 1월부터 1986년 8월까지 발표했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해산바가지」「애 보기가 쉽다고?」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에서 나타나는 하층민들의 인간애는 가진 자들의 야만성과 대비되어 더욱 빛을 발한다.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은 1979년 3월에서부터 1983년 8월까지 발표한 작품들을 수록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속물성과 위선이 난무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진다. 젊은 것들의 무관심과 조롱 속에서 외롭게 늙어가는 노인들의 모습을 담아낸 「황혼」「천변풍경泉邊風景」과, 출세한 자들의 허위를 그린 「내가 놓친 화합(和合)」「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 등이 그것이다.
『미망』은 조선조 말기에서 6ㆍ25 전쟁 직후까지 그 파란만장했던 시대를 한 개성 상인의 가족사를 통하여 재창조한 대하소설이다. 민족의 수난사와 더불어 고난과 격동의 시대를 험준한 산을 넘듯 숨가쁘게 살아온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박완서 소설 문체가 도달한 궁극적인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작가는 사람과 자연을 한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느낀 기쁨과 경탄, 감사와 애정을 담아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펴냈다. ‘친절한 책읽기?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연재했던 글도 함께 실어 노작가의 연륜과 성찰이 돋보이는 글을 선보였다.
1993년부터 국제연합아동기금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1994년부터 공연윤리위원회 위원, 1988년부터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으로 한국문학작가상, 『엄마의 말뚝』으로 제5회 이상문학상 『미망』으로 대한민국문학과 제3회 이상문학상 『꿈꾸는 인큐베이터』로 제38회 현대문학상 등을 받았다. 2006년, 문화예술인으로서 처음이자 여성으로서도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평소 입버릇처럼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고 고백해왔던 그녀는 전쟁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경험으로 글을 써왔다. 여러 편의 장편소설과 수필집, 동화집을 발표하고, 2010년 8월 수필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마지막으로 2011년 1월 22일, 담낭암 투병 중 별세했다. 경기 구리시에는 ''박완서 문학마을''이 조성될 예정이다.
그림 : 이철원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단국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노란집』 『우리가 어느 별에서』 『역사신문』 『길 위에 시간을 묻다』 『성경 익스프레스』 등의 단행본에 그림을 그렸고, 단편 애니메이션 〈Cloy〉 〈왕과 화가〉를 제작했다. 현재 『조선일보』 미술팀에서 일하고 있다.
▣ 주요 목차
책을 펴내며 7
들어가지 않고는 나올 수도 없는 문
우리 안에 공존하는 동방박사와 헤로데 17│복된 첫사랑의 추억 20│부르는 소리 있어… 23│이의 없습니다 27│차라리 해바라기가 되게 하소서 30│두 번 못 박긴 싫습니다 33│아아, 그렇군요 36│주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39│고고한 은둔에의 유혹 43│놀랍고 황홀한 순간 46│그 말씀만은 도저히 못 알아듣겠습니다 49│주님도 편애를 하시나요 52│최초의 크리스트 세일즈맨 55│은행나무보다 큰 봄까치꽃 58│에미 마음, 여자 마음 61│미처 알아보지 못한 만남들 64│들어가지 않고는 나올 수도 없는 문 67│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70│참으로 좋은 달 73│눈물 그렁한 당신의 시선 76│당신의 상흔을 알아보게 하소서 80│아이고, 하느님. 그것만은 못 하겠습니다 83│축복받은 첫 영성체 86│돌아오라, 다시 한 번 89│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92│숨을 곳을 모르겠나이다 95
이 고해에서 익사하지 않은 까닭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101│서 말의 구슬보다 한 톨의 씨앗으로 족하게 하소서 104│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싶은 근원적 물음 108│측은지심 111│이 고해에서 익사하지 않은 까닭 114│에미의 마음 117│예수님의 사랑법 120│헤아릴 길 없는 신비 124│내 이름으로 모인 곳 127│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130│주님의 잣대 133│말과 행동 136│내 친구 이야기 139│어떤 교만 142│빈 무덤 145│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148│최초의 경이 151│다양해서 아름다운 세상 154│가장 부끄러운 고백 157│산타 할아버지 160│외치는 소리 164│어느 중년 가장의 고백 167│두들겨 깨우소서 170│영광과 고통 173
순명의 아름다움
별을 보여주세요 179│길 182│부르시는 방법 185│말의 힘 189│우울한 전망 192│외딴곳 195│광야 198│아름다운 시절 201│우리에게 평화를 204│두려운 자유 208│빈방 211│공과 사 214│주여, 저희들을 쟁기질하소서 217│우리의 소원 220│예수님의 변덕 223│정보의 안개 226│잔인한 여름 230│우리 모두 돌아가야 할 곳 233│소금과 부패균 236│꽃보다 아름다운 계절 239│가난한 사람은 우리의 쓰레기통이 아니다 242│도망칠 수 없는 당신 245│주님, 어서 오소서 248│저희 마음에 요한을 보내주소서 252│지도자에게 겸손을 255│순명의 아름다움 258│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 26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언
선입관에 대하여 267│예수님의 미끼 270│자화상 273│나의 안과 밖 276│바위를 이기는 건 물뿐 279│내가 꿈꾸는 부활 282│궁금한 예수님의 얼굴 285│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언 288│우리가 구해야 할 기적 292│아빠라고 부르고 싶은 주님 295│우리는 야단맞아 쌉니다 298│또 하나의 기회 301│주님의 양면성 304│좁은 문은 지속적 관심 307│염량세태 310│당신의 종 313│신의 겸손 316│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 319│자비심 324│회개와 행동 327│요한의 의심 330│경천애인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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