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수사록]이란 무엇인가
저자 노이점은 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70세 생일을 맞이해 조선에서 보낸 사절단인 ‘사은겸진하사행謝恩兼進賀使行’의 일원으로 북경에 다녀온다. 모두가 아는 바처럼 같은 사행단의 일원이었던 연암 박지원은 이 사행의 기록을 역작 [열하일기]로 풀어낸다.
[수사록隨?錄]이란 제목은 이 연행록이 세상에 처음 소개될 때부터 관심을 끌어온 것으로, ‘사?’는 본래 [해사록海?錄]의 용례에서도 보이듯이 뗏목을 타고 바다를 통해 간 사신의 기록에 많이 사용됐다. 육로를 통해 명나라로 사행을 가서 지은 시문을 기록한 [동사록東?錄]의 경우와 같이 육로를 통한 사행에도 ‘사’자를 붙이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두보의 시 ?추흥팔수秋興八首?에도 ‘봉사허수팔월사奉使虛隨八月?’라는 구절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육로 사행이라는 의미로 ‘사’자를 썼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시재詩才로 유명했던 노이점이 이를 차용하여 쓴 듯하다.
동일한 사행 체험을 바탕에 두고 있기에, [수사록]의 가치는 [열하일기]와 대비시킬 때 오롯이 드러난다. 특히 [열하일기]가 놓친 것을 보충하거나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열하일기]에는 북경에서 한양까지 돌아오는 과정과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과정이 생략된 데 반해, [수사록]에는 사행의 전 경로가 성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열하일기]가 놓치고 있는 구체적인 노정의 복원과 고증이 가능해진다.
그대는 봄꽃, 나는 가을 열매
또한 노이점은 상방비장上房裨將(사신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던 무관 벼슬)의 신분으로 연암과 함께 연행을 하면서도 그와는 다른 세계관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래선지 같은 체험에 대해서도 다르거나 아예 상반된 입장에서 기록을 남긴다. 알다시피 박지원은 사대론과 북벌론을 극복해야 한다는 북학파의 선구였지만, 노이점은 여전히 배청숭명의 사대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둘은 타고난 기질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였다. 밤에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저잣거리를 활보하거나 사행단의 공식 루트를 벗어나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던 정력가 박지원과 달리, 노이점은 제3자의 시각으로 볼 때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타고난 본성도 차분한 사람”이었다. 예컨대 노이점과 박지원이 똑같이 만난 유명 인사 박명博明은, “박공朴公(연암 박지원)은 고명高明하고, 노군盧君(노이점)은 침잠沈潛한 사람이지요. 봄에 피는 꽃과 가을에 맺는 열매를 두 분이 각각 차지하고 있지요.”라고 말한다.
이러한 차이는 노이점과 박지원이 중국 인사들을 만나 필담하는 과정에서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노이점의 경우엔, 박명과 필담을 나누면서 경전 구절과 역사적 인물, 지명 등과 관련해 자기 지식을 보여주고 그것을 확인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하지만 박지원은 지전地轉을 비롯해 티베트 불교, 청나라 통치술 등의 문제에 대해 활발한 필담을 나누고, 새로운 세계 인식과 문화 동향에 주목하면서 자기 사유와 인식의 지평을 보여주려 한다.
이는 두 여행자가 행로를 공유했을 뿐 각자의 여행 체험과 그 결과가 상이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이로써 당시 조선의 외교 사절단(구성)에 대한 입체적인 판단도 가능해진다.
[열하일기]의 행간을 채우다
상술하였듯이 [수사록]에서는 [열하일기]의 공백을 메우는 지점이 종종 발견된다. 특히 그것은 북학파 박지원의 실제 모습과 그의 북학관의 성장을 관찰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의미 있는 사료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열하일기]에는 박지원이 황해도를 지나며 지전설地轉說에 대해 구체적인 토론을 준비한 것과 열하의 태학관에서 만주족과 한족의 인사들과 필담하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박지원이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와 노이점을 포함한 조선사행원과 지전설에 대해 다시 논의했던 사실은 빠져 있다. 그런데 [수사록]을 보면, 이 토론의 상황과 저간의 사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날 박지원은 열하에서 중국인 왕민호를 만나 지전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전하며, 자신의 지전설 주장을 피력한다. 그의 주장은 동행한 조선사신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토론의 장소도 북경의 서관西館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제재를 받지 않는 파격적인 관점이 자유롭게 소개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장에서 노이점은 주자가 주장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논리로 박지원의 주장에 반대했지만, “주장에 묘리가 있는 듯하다.”는 [수사록] 중의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역시 박지원의 논리적인 화술에 적지 않게 감동을 받은 듯하다.
그는 이 토론에 대한 충격과 박지원에 대한 흠모의 표시로 그에게 ?서관문답서西館問答序?([수사록] 후미에 함께 실려 있다)를 써서 전해 준다. 다소 과장된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는 [열하일기]를 남긴 박지원의 실제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없이 소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수사록]은 [열하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보충을 위한 의미 있는 자료로서, 같은 시기 사행과 관련된 또 다른 기록이자, 존화적 경향의 시각차와 당대 조선 지식인들의 대외 관계 인식을 조명하는 구체적인 사료가 된다.
연행록 다시 보기, [수사록] 깊이 읽기
사실 [수사록]을 단독 작품으로 놓고 바라본다면, 다른 연행록들과 비교해 큰 특장점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저자 노이점의 견문 부족, 배청숭명이라는 역사 인식의 한계는 여러 장면에서 굴절된 시각으로 표출되었다. 때문에 그의 시선에 청나라의 실상이 제대로 포착되었다고 쉬이 판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수사록]은 다른 연행록들이 지니지 못한 독특한 가치를 보유한다.
먼저 [수사록]은 ‘충실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노이점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매일 성실하게 기록했다. 단순한 기행 체험인 경우에는 짧게 서술했지만, 사신 업무와 관련된 공식 행사는 물론, 북경에 체류하면서 명소를 방문하거나 예컨대 박명과 같은 유명 인사를 만나 필담을 나누는 등의 비중 있는 일에 대해서는 상세하고 길게 서술했다. 또한 기존의 연행록들이 주로 사대부 벼슬아치들 사이에서 창작됐던 것에 견주어, [수사록]은 상방비장으로서, 사행에 참가한 정사나 부사를 수행한 중인中人의 북경 기행록이라는 점에서도 남다른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놓쳐서는 안 되는 지점이 있다. 바로 노이점이 박지원을 관찰하여 남긴 기록들과 박지원이 도저히 남길 수 없는 내용을 다른 공간에서 묘사하고 기록한 것이다(덧붙여 이와 반대로 박지원이 노이점을 형상화해 [열하일기]에 기록한 것들은 [수사록]을 통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노이점과 박지원은 세계관에 있어서도 대비되는 면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로써 당시 사행단의 분위기도 짐작 가능하거니와, 좀 더 확산시켜 말한다면,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자신의 북학 사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로 삼은 것도, 사실 그가 노이점 등을 만나 이야기하던 중에 계발을 받아 더욱 소신을 가지고 의견을 개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컨대 [수사록]과 [열하일기]는 서로의 내용을 보충하고 안팎으로 짝을 이루면서 묘한 대비를 이루는 연행록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련성을 고려해, 이 책에서는 [수사록]과 [열하일기]의 기록이 서로 공유하는 일정에 대해, [수사록]의 각 기사 후미에 해당 일자별로 [열하일기]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정리해 두었다. 아울러 1780년 저 연행의 노정을 현재적 시점에서 다시 좇으면서 옮긴이가 직접 찍어 수록한 현장 사진들도 독서의 효과를 배가시키거니와 당시 [수사록]의 노이점과 [열하일기]의 박지원의 여정이 엇갈렸던 요양성, 광녕성 부근의 모습도 고증을 통해 시각화한 지도로써 재현해 놓았다.
▣ 작가 소개
저자 : 노이점盧以漸,(1720~1788)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홍士鴻, 호는 추산楸山이다. 1720년(숙종 46)에 무과 출신 노언준盧彦駿의 둘째이자 서자로 태어났으며, 족형인 노이형盧以亨에게 글을 배웠다. 1756년(영조 32)에 37세의 늦은 나이로 병자식년사마시丙子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해, 이후 장릉참봉長陵參奉과 한성부의 서부봉사西部奉事를 역임했다. 1780년(정조 4)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맞이해 조선에서 보낸 사절단인 사은겸진하사행謝恩兼進賀使行의 일원으로, 연암 박지원과 함께 사행使行에 참여했다. [수사록隨?錄]은 당시 그의 연행의 기록이다. 진택震澤 신광하申光河와 시를 주고받았으며, 몽고인인 박명博明과도 교류하였다.
역자 : 김동석
속리산을 지척에 둔 충북 보은 출신으로, 성균관대학교에서 ?수사록 연구?열하일기와 비교의 관점에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열하일기]를 비롯해, 18세기 외교 사절로 청나라에 파견 다녀온 조선사신들의 중국 여행기(연행록)들에 주목하며, 당대 동아시아 문명ㆍ문화 교류의 지형을 꾸준히 연구해 왔다. 오랜 기간 베이징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 연구학자로 지내며, 가까이서 중국의 실체를 보고 듣고 느꼈다. 주요 논문으로, ?열하일기의 인물 형상화 수법?, ?수사록과 기타 자료를 통해 읽어 보는 열하일기?, ?조선 후기 연행록의 미학적 특질?, ?일제강점기 때 소개된 연암 저술?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책을 펴내며
해제_[열하일기]의 행간을 채우다, [수사록]
일러두기
1. 한양에서 압록강까지 |5월 25일에서 6월 24일|
2. 강을 건너다 |6월 25일에서 7월 9일|
3. 심양에서 |7월 10일에서 7월 14일|
4. 산해관에 들다 |7월 15일에서 7월 23일|
5. 고국이 떠올라 |7월 24일에서 7월 30일|
6. 북경 생활 |8월 1일에서 9월 16일|
7.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 |9월 17일에서 10월 27일|
ㆍ 의주에서 연경까지 노정의 기록
ㆍ 박명에게 주는 편지
ㆍ 서관문답서
ㆍ 반선에 대한 이야기
수사록 원문
참고문헌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
[수사록]이란 무엇인가
저자 노이점은 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70세 생일을 맞이해 조선에서 보낸 사절단인 ‘사은겸진하사행謝恩兼進賀使行’의 일원으로 북경에 다녀온다. 모두가 아는 바처럼 같은 사행단의 일원이었던 연암 박지원은 이 사행의 기록을 역작 [열하일기]로 풀어낸다.
[수사록隨?錄]이란 제목은 이 연행록이 세상에 처음 소개될 때부터 관심을 끌어온 것으로, ‘사?’는 본래 [해사록海?錄]의 용례에서도 보이듯이 뗏목을 타고 바다를 통해 간 사신의 기록에 많이 사용됐다. 육로를 통해 명나라로 사행을 가서 지은 시문을 기록한 [동사록東?錄]의 경우와 같이 육로를 통한 사행에도 ‘사’자를 붙이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두보의 시 ?추흥팔수秋興八首?에도 ‘봉사허수팔월사奉使虛隨八月?’라는 구절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육로 사행이라는 의미로 ‘사’자를 썼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시재詩才로 유명했던 노이점이 이를 차용하여 쓴 듯하다.
동일한 사행 체험을 바탕에 두고 있기에, [수사록]의 가치는 [열하일기]와 대비시킬 때 오롯이 드러난다. 특히 [열하일기]가 놓친 것을 보충하거나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열하일기]에는 북경에서 한양까지 돌아오는 과정과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과정이 생략된 데 반해, [수사록]에는 사행의 전 경로가 성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열하일기]가 놓치고 있는 구체적인 노정의 복원과 고증이 가능해진다.
그대는 봄꽃, 나는 가을 열매
또한 노이점은 상방비장上房裨將(사신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던 무관 벼슬)의 신분으로 연암과 함께 연행을 하면서도 그와는 다른 세계관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래선지 같은 체험에 대해서도 다르거나 아예 상반된 입장에서 기록을 남긴다. 알다시피 박지원은 사대론과 북벌론을 극복해야 한다는 북학파의 선구였지만, 노이점은 여전히 배청숭명의 사대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둘은 타고난 기질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였다. 밤에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저잣거리를 활보하거나 사행단의 공식 루트를 벗어나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던 정력가 박지원과 달리, 노이점은 제3자의 시각으로 볼 때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타고난 본성도 차분한 사람”이었다. 예컨대 노이점과 박지원이 똑같이 만난 유명 인사 박명博明은, “박공朴公(연암 박지원)은 고명高明하고, 노군盧君(노이점)은 침잠沈潛한 사람이지요. 봄에 피는 꽃과 가을에 맺는 열매를 두 분이 각각 차지하고 있지요.”라고 말한다.
이러한 차이는 노이점과 박지원이 중국 인사들을 만나 필담하는 과정에서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노이점의 경우엔, 박명과 필담을 나누면서 경전 구절과 역사적 인물, 지명 등과 관련해 자기 지식을 보여주고 그것을 확인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하지만 박지원은 지전地轉을 비롯해 티베트 불교, 청나라 통치술 등의 문제에 대해 활발한 필담을 나누고, 새로운 세계 인식과 문화 동향에 주목하면서 자기 사유와 인식의 지평을 보여주려 한다.
이는 두 여행자가 행로를 공유했을 뿐 각자의 여행 체험과 그 결과가 상이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이로써 당시 조선의 외교 사절단(구성)에 대한 입체적인 판단도 가능해진다.
[열하일기]의 행간을 채우다
상술하였듯이 [수사록]에서는 [열하일기]의 공백을 메우는 지점이 종종 발견된다. 특히 그것은 북학파 박지원의 실제 모습과 그의 북학관의 성장을 관찰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의미 있는 사료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열하일기]에는 박지원이 황해도를 지나며 지전설地轉說에 대해 구체적인 토론을 준비한 것과 열하의 태학관에서 만주족과 한족의 인사들과 필담하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박지원이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와 노이점을 포함한 조선사행원과 지전설에 대해 다시 논의했던 사실은 빠져 있다. 그런데 [수사록]을 보면, 이 토론의 상황과 저간의 사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날 박지원은 열하에서 중국인 왕민호를 만나 지전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전하며, 자신의 지전설 주장을 피력한다. 그의 주장은 동행한 조선사신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토론의 장소도 북경의 서관西館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제재를 받지 않는 파격적인 관점이 자유롭게 소개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장에서 노이점은 주자가 주장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논리로 박지원의 주장에 반대했지만, “주장에 묘리가 있는 듯하다.”는 [수사록] 중의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역시 박지원의 논리적인 화술에 적지 않게 감동을 받은 듯하다.
그는 이 토론에 대한 충격과 박지원에 대한 흠모의 표시로 그에게 ?서관문답서西館問答序?([수사록] 후미에 함께 실려 있다)를 써서 전해 준다. 다소 과장된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는 [열하일기]를 남긴 박지원의 실제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없이 소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수사록]은 [열하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보충을 위한 의미 있는 자료로서, 같은 시기 사행과 관련된 또 다른 기록이자, 존화적 경향의 시각차와 당대 조선 지식인들의 대외 관계 인식을 조명하는 구체적인 사료가 된다.
연행록 다시 보기, [수사록] 깊이 읽기
사실 [수사록]을 단독 작품으로 놓고 바라본다면, 다른 연행록들과 비교해 큰 특장점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저자 노이점의 견문 부족, 배청숭명이라는 역사 인식의 한계는 여러 장면에서 굴절된 시각으로 표출되었다. 때문에 그의 시선에 청나라의 실상이 제대로 포착되었다고 쉬이 판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수사록]은 다른 연행록들이 지니지 못한 독특한 가치를 보유한다.
먼저 [수사록]은 ‘충실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노이점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매일 성실하게 기록했다. 단순한 기행 체험인 경우에는 짧게 서술했지만, 사신 업무와 관련된 공식 행사는 물론, 북경에 체류하면서 명소를 방문하거나 예컨대 박명과 같은 유명 인사를 만나 필담을 나누는 등의 비중 있는 일에 대해서는 상세하고 길게 서술했다. 또한 기존의 연행록들이 주로 사대부 벼슬아치들 사이에서 창작됐던 것에 견주어, [수사록]은 상방비장으로서, 사행에 참가한 정사나 부사를 수행한 중인中人의 북경 기행록이라는 점에서도 남다른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놓쳐서는 안 되는 지점이 있다. 바로 노이점이 박지원을 관찰하여 남긴 기록들과 박지원이 도저히 남길 수 없는 내용을 다른 공간에서 묘사하고 기록한 것이다(덧붙여 이와 반대로 박지원이 노이점을 형상화해 [열하일기]에 기록한 것들은 [수사록]을 통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노이점과 박지원은 세계관에 있어서도 대비되는 면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로써 당시 사행단의 분위기도 짐작 가능하거니와, 좀 더 확산시켜 말한다면,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자신의 북학 사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로 삼은 것도, 사실 그가 노이점 등을 만나 이야기하던 중에 계발을 받아 더욱 소신을 가지고 의견을 개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컨대 [수사록]과 [열하일기]는 서로의 내용을 보충하고 안팎으로 짝을 이루면서 묘한 대비를 이루는 연행록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련성을 고려해, 이 책에서는 [수사록]과 [열하일기]의 기록이 서로 공유하는 일정에 대해, [수사록]의 각 기사 후미에 해당 일자별로 [열하일기]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정리해 두었다. 아울러 1780년 저 연행의 노정을 현재적 시점에서 다시 좇으면서 옮긴이가 직접 찍어 수록한 현장 사진들도 독서의 효과를 배가시키거니와 당시 [수사록]의 노이점과 [열하일기]의 박지원의 여정이 엇갈렸던 요양성, 광녕성 부근의 모습도 고증을 통해 시각화한 지도로써 재현해 놓았다.
▣ 작가 소개
저자 : 노이점盧以漸,(1720~1788)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홍士鴻, 호는 추산楸山이다. 1720년(숙종 46)에 무과 출신 노언준盧彦駿의 둘째이자 서자로 태어났으며, 족형인 노이형盧以亨에게 글을 배웠다. 1756년(영조 32)에 37세의 늦은 나이로 병자식년사마시丙子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해, 이후 장릉참봉長陵參奉과 한성부의 서부봉사西部奉事를 역임했다. 1780년(정조 4)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맞이해 조선에서 보낸 사절단인 사은겸진하사행謝恩兼進賀使行의 일원으로, 연암 박지원과 함께 사행使行에 참여했다. [수사록隨?錄]은 당시 그의 연행의 기록이다. 진택震澤 신광하申光河와 시를 주고받았으며, 몽고인인 박명博明과도 교류하였다.
역자 : 김동석
속리산을 지척에 둔 충북 보은 출신으로, 성균관대학교에서 ?수사록 연구?열하일기와 비교의 관점에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열하일기]를 비롯해, 18세기 외교 사절로 청나라에 파견 다녀온 조선사신들의 중국 여행기(연행록)들에 주목하며, 당대 동아시아 문명ㆍ문화 교류의 지형을 꾸준히 연구해 왔다. 오랜 기간 베이징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 연구학자로 지내며, 가까이서 중국의 실체를 보고 듣고 느꼈다. 주요 논문으로, ?열하일기의 인물 형상화 수법?, ?수사록과 기타 자료를 통해 읽어 보는 열하일기?, ?조선 후기 연행록의 미학적 특질?, ?일제강점기 때 소개된 연암 저술?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책을 펴내며
해제_[열하일기]의 행간을 채우다, [수사록]
일러두기
1. 한양에서 압록강까지 |5월 25일에서 6월 24일|
2. 강을 건너다 |6월 25일에서 7월 9일|
3. 심양에서 |7월 10일에서 7월 14일|
4. 산해관에 들다 |7월 15일에서 7월 23일|
5. 고국이 떠올라 |7월 24일에서 7월 30일|
6. 북경 생활 |8월 1일에서 9월 16일|
7.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 |9월 17일에서 10월 27일|
ㆍ 의주에서 연경까지 노정의 기록
ㆍ 박명에게 주는 편지
ㆍ 서관문답서
ㆍ 반선에 대한 이야기
수사록 원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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