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내가 희망하는 희망은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우리는 흔히 낙관주의적인 관점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지금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앞으로는 잘 될거야’ ‘희망을 갖는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야’ ‘희망은 맨 마지막까지 사는 법이야’ 그리고 노력한다, 맹목적으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또는 기적을 이야기하면서 내게도 기적이 올 것이라고 희망을 한다. ‘로또가 맞을 것이다’라고 희망한다. 과연 이것이 희망일까?
테리 이글턴은 이런 절망적인 희망을 낙관주의의 허울에 쌓인 희망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희망이 아니다.
낙관주의적 희망은 희망의 포기 의 다른 모습
그동안 우리사회에서 희망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는 희망을 소홀하게 다뤄왔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희망을 비굴하게 포기해왔기 때문이다.
희망을 포기하는 방법은 다양하였다. 그 중의 하나는 낙관주의라는 허울을 씌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낙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괴롭히는 절망의 다른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낙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은 실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낙관적이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장미빛안경을 쓰고 사물을 바라보고 장미빛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를 달성하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또는 노력을 해도 전혀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낙관주의로 포장된 희망은 근거없는 희망, 즉 절망이기 때문이다.
희망과 욕망의 차이
희망과 욕망의 차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희망한다”는 그저 “나는 그렇게 소망한다”를 의미할 수 있다. 담배 한 개비를 바라는 욕구와 그것을 기대하는 희망 사이에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희망을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랑과 욕망’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는 ‘해로운 희망도 이로운 욕망도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희망도 욕망도 도덕적 상태일 수 있지만 둘 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욕망은 대체로 특정한 대상을 바라는 반면에 희망의 목표는 대체로 어떤 상황이다. 그렇지만 상황의 발생을 욕망하거나 더 부드러운 얼굴피부를 희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한 ‘누군가에게 희망을 건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이 말은 곧 그 사람이 누군가를 ‘그 사람의 소원을 성취해줘서 그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을 사람’으로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미 소유한 것을 욕망할 (그리고 확실히 사랑할) 수는 있지만 희망할 수는 없다’는 말도 유의미하다.
희망은 무엇인가
‘인간은 발생하리라고 확신하는 일이 앞으로 발생하기를 희망할 수 없다’
기독교신자들은 신국의 출현을 확실성의 문제로 간주하면서도 신국의 출현을 기대하는 희망을 덕목으로 간주한다. “나는 그렇게 희망한다”는 관용어의 지극히 평범한 용법과 다르게, 그들은 앞으로 발생하리라고 확신하는 어떤 것을 신뢰한다. 사도 바울에게 희망은 메시아의 출현을 끈질기고 기쁘게 확신하면서 기다리는 과정을 의미한다. 라이프니츠의 희망은 그의 우주적 낙관주의에 기반을 두는 것이라서 논쟁을 불허한다. 그의 관점에서 희망은 평온한 확신의 문제이다.
알랭 바디우는 ‘비난을 불허하는 신학의 정통학설에서 희망은 확실성과 연관되며 신앙은 확신과 연관된다’고 말한다
제인 오스틴이 소설 『설득Persuasion』에서 희망을 “미래를 믿는 명랑한 확신”으로 지칭한 것도 그런 희망을 재현하는 것이다. 기독교경전 『시편Psalms』은 ‘희망은 꺾이지 않으리라’고 장담하고 사도 바울은 ‘희망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어느 해설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에서 희망은 경솔한 낙관주의와 동떨어진 “확고부동한 신념과 설레는 확신”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희망이 ‘기원祈願하는 성질’뿐 아니라 ‘실행하는 성질’도 겸비한다. 어느 현대 사상가는 희망을 “어떤 목적의 바람직함과 실현 가능성에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헌신”으로 보면서 심리상태의 일종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오히려 활동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면 진정한 만족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런 희망소멸상태가 반드시 절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반대로 그런 상태는 절망을 치료하는 가장 강력한 효험을 발휘할 수 있다. 실행 불가능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파멸을 예방할 수 있다. 희망의 반대는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용감한 체념정신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쇼펜하워는 ‘희망은 거짓기대감들로써 평정심을 교란하는 악惡의 근원이다’고 생각한다. 만약 인간이 완벽해질 때까지 영생할 수 있다면 모든 결핍에서 해방되면서 모든 희망에서도 해방될 것이고 종국에는 모든 실망에서도 해방될 것이다.
희망은 단순히 목적론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이 희망을 상실할 수 있어도 절망을 상실할 수는 없다. 비극과 마찬가지로 희망은 ‘인간이 짊어져야 할 운명’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인간이 운명과 맺어야 할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은 적어도 ‘타인들이 나의 곤경을 보면서 교훈을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하는 희망을 언제나 미미하게라도 품을 수 있다. 더구나 희망은 문화나 교육 같아서 비록 희망을 상실한 인간도 자손에게 유산을 물려주듯이 희망을 물려줄 수 있다.
결국 이글턴이 감지하는 희망은 경박한 낙관주의에 오염된 희망을 정련하고 제련하는 것으로서 ‘희망과 욕망의 비극적 관계’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저평가되어온 희망의 가치를 상승시켜서 ‘희망과 절망의 역리적逆理的 관계’를 교차하고 융합한다. 그렇게 했을 때에만 이글턴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희망”의 여건을 조성하고 에른스트 블로흐의 허망하고 낙관적인 희망에 대항하는 ‘값지고 현실적인 희망’의 조건을 구성할 것이다. 그렇게 생성되는 희망은 욕망과 비극과 절망을 엄밀하게 직시하면서 낙관하지도 절망하지도 않는 희망이 될 것이다.
번역자 후기
만약 오직 정치의 위기와 자본주의체제의 위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위기와 심지어 때로는 죽음들마저 운위될 정도로 워낙 심하게 퇴락해서 암울하게나 암담하게 실감되는 지역이나 시대가 있다면, 그런 지역에나 시대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희망은 오히려 괴롭게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희망이 기본적으로 “앞일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지고 바람”이나 “앞으로 잘될 수 있는 가능성”이고, “바람”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며, “가능성”은 “앞으로 실현될 수 있거나 성장할 수 있는 성질이나 정도定度”이거늘, 희망이 그것을 품는 인간을 괴롭힐 수 있다면, 희망은 불교계에서나 심리학계에서 “욕망”으로 일컬어지는 부정적 심정의 일종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테리 이글턴은 희망이 비록 욕망과 비슷할지언정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의 관점에서 희망이 괴로운 것으로 보일 수 있다면 비극적 성질을 함유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인지 그가 주시하는 “진정한 희망”은 비극과 밀접하게 맞물려서 연동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보이는 욕망은 비극을 초래하고 비극은 희망을 제련하여 정련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희망의 이런 비극성은 그리스 신화에서도 극명하게 표현된다. 판도라의 상자는, 적어도 서양에서는, 여태껏 희망을 심지어 인간을 가장 심하게 끝까지 괴롭히는 최후최심악덕 같은 것으로 인식시켜왔으리만큼 비극적인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렇더라도 한편으로는 희망이 “실제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고대에는 ‘신뢰감’을 의미했다고 설명된”다면, 그리고 ‘어떤 기대’를 품는 사람의 ‘바람’이나 ‘잘될 수 있을 가능성’으로 생각된다면, 어쩌면 이른바 실낱같은 희망마저 불허하는 듯이 보이는 암담한 지역에나 시대에는, 그러니까 언필칭 ‘희망을 품을 수 있는 희망이나 가능성’조차 도무지 발견되기 어려우리만치 절망스럽고 참담한 지역에나 시대에는, 기묘하게도, 희망은 최후최심악덕이기는커녕 오히려 최후최심미덕의 묘미를 띠고 거듭날 수 있을 듯이 보이곤 한다. 그래서 희망이 절망 속에서 최후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 듯이도 보인다.
이글턴이 감지하는 ‘희망의 초월성’은 바로 경박한 낙관주의에 오염된 희망을 정련하고 제련하는 이런 ‘희망과 욕망의 비극적 관계’와 여태껏 의외로 저평가되어온 희망의 가치를 상승시키는 이런 ‘희망과 절망의 역리적逆理的 관계’가 교차하고 융합하는 인격과 정신에서 생성될 만한 것이다. 그런 관계들이 바로 이글턴이 상정하는 “진정한 희망”의 여건을 조성하고 에른스트 블로흐의 허망하고 낙관적 희망에 대항하는 ‘값지고 현실적인 희망’의 조건을 구성할 것이다. 그렇게 생성되는 희망은 욕망과 비극과 절망을 엄밀하게 직시하면서 낙관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추천사
우리가 빠져든 곤란지경의 도처에서 횡행하는 낙관주의는 당연히 가짜이다. 오직 진정한 희망을 지참한 사람들만이 우리가 다가가는 지옥을 감히 직시할 수 있다. 이 책은 암담해져가는 현대에 적확하게 들어맞는 진실한 종교의 가장 뛰어난 고백서이다.
-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유고슬라비아의 철학자 겸 비판이론가)
이 책에는 소설들, 사회이론, 시, 철학, 문학이론, 역사, 드라마, 신학 같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폭넓은 지성과 유려한 필치로 전개되는 예지적 발상들이 넘쳐난다. 이글턴의 압도적이리만치 일관되고 위력적인 전망과 대단히 풍부하고 참신한 통찰들이 감동을 유발한다.
- 레이먼드 게스Raymond Geuss(브리튼 케임브리지 대학교 명예교수 겸 정치철학자)
근래 몇 년간 이글턴이 펴낸 저서들은 널리 읽히는 “필독서들”이었다. 희망을 다루는 신학저서들이 있지만 이클턴의 저서처럼 문학이론, 마르크스주의이론, 정치학, 신학을 원활하고 명민하게 횡단하는 저서는 없다. 이 책의 제4장은 빛나는 신학적 논설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희망해야 할 것 - 아직은 별로 많지도 않되 아예 없지도 않은 것 - 에 관한 매우 감동적인 에세이이다. 그리고 하여간 뭔가 있기는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의 차이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면서도 유일한 차이다. 이글턴은 바로 그런 까닭을 해명해준다.
- 데니스 앨런 터너Denys Alan Turner(브리튼의 철학자 겸 신학자)
해박하고 신중하며 유머러스한 거장의 풍모를 과시하는 테리 이글턴은 고대 그리스에서 오늘날에까지 6천여 년에 걸쳐 개념화되어온 (때로는 오인되어온) 희망의 개념을 낱낱이 해부한다. 그는 희망을 단순한 낙관주의, 명랑성, 욕망, 이상주의와도 구별하고 진보주의를 신봉하는 충심과도 구별한다. 그런 희망은 성찰과 헌신을 요구하는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명석한 합리주의에서 생겨나므로 실천과 자아수양을 통해 함양될 수 있으며, 좌절과 패배를 강요하는 현실들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현실들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진정한 희망은 명백하게 비극적인 것일지라도 이글턴은 그런 희망의 급진적 함의들을 찬성하는데, 왜냐면 “그런 희망은 영속혁명의 일종이고, 그래서 메타자연학적 절망이 그런 희망의 적敵이니만치 정치적 자만심도 그런 희망의 적”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희망은 현재를 저평가하지도 않고 과거를 삭제하지도 않으면서 미래를 직면하는 데 요긴한 수단이다. 수세기에 걸쳐 진행된 희망양상들에 관한 - 에른스트 블로흐의 기념될 만한 저서뿐 아니라 스토아철학자들,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크스, 키르케고르를 위시한 사상가들의 - 생각들을 명민하게 고찰하고 깊게 통찰하는 이 책은 종교적 신념과 정치이념뿐 아니라 악惡의 문제, 언어의 역할, 과거의 의미까지도 새롭게 조명한다. 이 책은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 세계에서 인간의 신념과 욕망을 탁월하게 조명하는 인상적인 연대기이다.
- 미국 예일Yale 대학교 출판부
▣ 작가 소개
저 : 테리 이글턴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로 맨체스터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세기와 20세기 영미문학을 연구하면서 문학의 이데올로기적 배후를 폭로하는 데 주력했던 그는 문화연구 쪽으로 방향을 틀어 왕성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동시에 영국 내의 좌파 조직에서도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대학 재학 중에 이미 가톨릭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사회·정치·문화론에 관한 글을 썼다. 그 후 구조주의 기호론, 정신분석학 등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독자적인 유물론적 문예론을 펼쳐나갔다. 서구사회에서 문학이 담당해온 역할에 다분히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문학이라는 대상의 이데올로기적 배후를 살피고 폭로하는 데 주력한다.
트리니티 대학, 캠브리지 대학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루이 알튀세의 영향을 받았으며, 슬라보예 지젝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고 학문의 세계를 여전히 넓혀나가고 있다. 2003년에 펴낸 『이론 이후』에서는 그간의 태도와 달리 문화이론과 문학이론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며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절대적인 것 거부를 비판하며 절대적인 것, 진리를 옹호한다.
주요 저술로는 『이성, 신앙, 혁명 : 신에 관한 논쟁 고찰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2009), 『삶의 의미』(2007), 『성스러운 테러』(2007), 『영소설』(2004), 『이론 이후After Theory』(2003), 『문화의 이념』(2000), 『포스트 모더니즘의 환상The Illusions of Postmodernism』(1996), 『미학의 이데올로기The Ideology of the Aesthetic』(1990), 『문학이론 입문』(1983) 등이 있다.
역 : 김성균
숭실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번역과 출판기획편집을 병행한다. 논문으로 「헤겔의 변증법적 이성과 인정투쟁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서구 자본주의 욕망에 대한 제3세계의 강박적 욕망과 그 전망」이 있고, 메타비평으로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 그래서 누가 더 많이 돌았는가?」,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왜 쓸쓸했는가?」, 「적대적 비판에 대한 고독한 냉소」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명상의 기술』, 『유한계급론』, 『낯선 육체』, 『자유주의의 본질』, 『테네시 윌리엄스』, 『바바리안의 유럽침략』, 『군중심리』, 『군중행동』, 『니체 자서전: 나의 여동생과 나』 『자살클럽』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서문
1장 낙관주의의 진부함
2장 희망이란 무엇인가?
3장 희망철학자
4장 희망에 대항하는 희망
번역자 후기
주
찾아보기
내가 희망하는 희망은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우리는 흔히 낙관주의적인 관점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지금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앞으로는 잘 될거야’ ‘희망을 갖는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야’ ‘희망은 맨 마지막까지 사는 법이야’ 그리고 노력한다, 맹목적으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또는 기적을 이야기하면서 내게도 기적이 올 것이라고 희망을 한다. ‘로또가 맞을 것이다’라고 희망한다. 과연 이것이 희망일까?
테리 이글턴은 이런 절망적인 희망을 낙관주의의 허울에 쌓인 희망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희망이 아니다.
낙관주의적 희망은 희망의 포기 의 다른 모습
그동안 우리사회에서 희망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는 희망을 소홀하게 다뤄왔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희망을 비굴하게 포기해왔기 때문이다.
희망을 포기하는 방법은 다양하였다. 그 중의 하나는 낙관주의라는 허울을 씌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낙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괴롭히는 절망의 다른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낙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은 실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낙관적이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장미빛안경을 쓰고 사물을 바라보고 장미빛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를 달성하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또는 노력을 해도 전혀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낙관주의로 포장된 희망은 근거없는 희망, 즉 절망이기 때문이다.
희망과 욕망의 차이
희망과 욕망의 차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희망한다”는 그저 “나는 그렇게 소망한다”를 의미할 수 있다. 담배 한 개비를 바라는 욕구와 그것을 기대하는 희망 사이에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희망을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랑과 욕망’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는 ‘해로운 희망도 이로운 욕망도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희망도 욕망도 도덕적 상태일 수 있지만 둘 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욕망은 대체로 특정한 대상을 바라는 반면에 희망의 목표는 대체로 어떤 상황이다. 그렇지만 상황의 발생을 욕망하거나 더 부드러운 얼굴피부를 희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한 ‘누군가에게 희망을 건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이 말은 곧 그 사람이 누군가를 ‘그 사람의 소원을 성취해줘서 그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을 사람’으로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미 소유한 것을 욕망할 (그리고 확실히 사랑할) 수는 있지만 희망할 수는 없다’는 말도 유의미하다.
희망은 무엇인가
‘인간은 발생하리라고 확신하는 일이 앞으로 발생하기를 희망할 수 없다’
기독교신자들은 신국의 출현을 확실성의 문제로 간주하면서도 신국의 출현을 기대하는 희망을 덕목으로 간주한다. “나는 그렇게 희망한다”는 관용어의 지극히 평범한 용법과 다르게, 그들은 앞으로 발생하리라고 확신하는 어떤 것을 신뢰한다. 사도 바울에게 희망은 메시아의 출현을 끈질기고 기쁘게 확신하면서 기다리는 과정을 의미한다. 라이프니츠의 희망은 그의 우주적 낙관주의에 기반을 두는 것이라서 논쟁을 불허한다. 그의 관점에서 희망은 평온한 확신의 문제이다.
알랭 바디우는 ‘비난을 불허하는 신학의 정통학설에서 희망은 확실성과 연관되며 신앙은 확신과 연관된다’고 말한다
제인 오스틴이 소설 『설득Persuasion』에서 희망을 “미래를 믿는 명랑한 확신”으로 지칭한 것도 그런 희망을 재현하는 것이다. 기독교경전 『시편Psalms』은 ‘희망은 꺾이지 않으리라’고 장담하고 사도 바울은 ‘희망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어느 해설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에서 희망은 경솔한 낙관주의와 동떨어진 “확고부동한 신념과 설레는 확신”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희망이 ‘기원祈願하는 성질’뿐 아니라 ‘실행하는 성질’도 겸비한다. 어느 현대 사상가는 희망을 “어떤 목적의 바람직함과 실현 가능성에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헌신”으로 보면서 심리상태의 일종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오히려 활동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면 진정한 만족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런 희망소멸상태가 반드시 절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반대로 그런 상태는 절망을 치료하는 가장 강력한 효험을 발휘할 수 있다. 실행 불가능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파멸을 예방할 수 있다. 희망의 반대는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용감한 체념정신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쇼펜하워는 ‘희망은 거짓기대감들로써 평정심을 교란하는 악惡의 근원이다’고 생각한다. 만약 인간이 완벽해질 때까지 영생할 수 있다면 모든 결핍에서 해방되면서 모든 희망에서도 해방될 것이고 종국에는 모든 실망에서도 해방될 것이다.
희망은 단순히 목적론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이 희망을 상실할 수 있어도 절망을 상실할 수는 없다. 비극과 마찬가지로 희망은 ‘인간이 짊어져야 할 운명’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인간이 운명과 맺어야 할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은 적어도 ‘타인들이 나의 곤경을 보면서 교훈을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하는 희망을 언제나 미미하게라도 품을 수 있다. 더구나 희망은 문화나 교육 같아서 비록 희망을 상실한 인간도 자손에게 유산을 물려주듯이 희망을 물려줄 수 있다.
결국 이글턴이 감지하는 희망은 경박한 낙관주의에 오염된 희망을 정련하고 제련하는 것으로서 ‘희망과 욕망의 비극적 관계’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저평가되어온 희망의 가치를 상승시켜서 ‘희망과 절망의 역리적逆理的 관계’를 교차하고 융합한다. 그렇게 했을 때에만 이글턴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희망”의 여건을 조성하고 에른스트 블로흐의 허망하고 낙관적인 희망에 대항하는 ‘값지고 현실적인 희망’의 조건을 구성할 것이다. 그렇게 생성되는 희망은 욕망과 비극과 절망을 엄밀하게 직시하면서 낙관하지도 절망하지도 않는 희망이 될 것이다.
번역자 후기
만약 오직 정치의 위기와 자본주의체제의 위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위기와 심지어 때로는 죽음들마저 운위될 정도로 워낙 심하게 퇴락해서 암울하게나 암담하게 실감되는 지역이나 시대가 있다면, 그런 지역에나 시대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희망은 오히려 괴롭게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희망이 기본적으로 “앞일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지고 바람”이나 “앞으로 잘될 수 있는 가능성”이고, “바람”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며, “가능성”은 “앞으로 실현될 수 있거나 성장할 수 있는 성질이나 정도定度”이거늘, 희망이 그것을 품는 인간을 괴롭힐 수 있다면, 희망은 불교계에서나 심리학계에서 “욕망”으로 일컬어지는 부정적 심정의 일종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테리 이글턴은 희망이 비록 욕망과 비슷할지언정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의 관점에서 희망이 괴로운 것으로 보일 수 있다면 비극적 성질을 함유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인지 그가 주시하는 “진정한 희망”은 비극과 밀접하게 맞물려서 연동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보이는 욕망은 비극을 초래하고 비극은 희망을 제련하여 정련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희망의 이런 비극성은 그리스 신화에서도 극명하게 표현된다. 판도라의 상자는, 적어도 서양에서는, 여태껏 희망을 심지어 인간을 가장 심하게 끝까지 괴롭히는 최후최심악덕 같은 것으로 인식시켜왔으리만큼 비극적인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렇더라도 한편으로는 희망이 “실제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고대에는 ‘신뢰감’을 의미했다고 설명된”다면, 그리고 ‘어떤 기대’를 품는 사람의 ‘바람’이나 ‘잘될 수 있을 가능성’으로 생각된다면, 어쩌면 이른바 실낱같은 희망마저 불허하는 듯이 보이는 암담한 지역에나 시대에는, 그러니까 언필칭 ‘희망을 품을 수 있는 희망이나 가능성’조차 도무지 발견되기 어려우리만치 절망스럽고 참담한 지역에나 시대에는, 기묘하게도, 희망은 최후최심악덕이기는커녕 오히려 최후최심미덕의 묘미를 띠고 거듭날 수 있을 듯이 보이곤 한다. 그래서 희망이 절망 속에서 최후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 듯이도 보인다.
이글턴이 감지하는 ‘희망의 초월성’은 바로 경박한 낙관주의에 오염된 희망을 정련하고 제련하는 이런 ‘희망과 욕망의 비극적 관계’와 여태껏 의외로 저평가되어온 희망의 가치를 상승시키는 이런 ‘희망과 절망의 역리적逆理的 관계’가 교차하고 융합하는 인격과 정신에서 생성될 만한 것이다. 그런 관계들이 바로 이글턴이 상정하는 “진정한 희망”의 여건을 조성하고 에른스트 블로흐의 허망하고 낙관적 희망에 대항하는 ‘값지고 현실적인 희망’의 조건을 구성할 것이다. 그렇게 생성되는 희망은 욕망과 비극과 절망을 엄밀하게 직시하면서 낙관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추천사
우리가 빠져든 곤란지경의 도처에서 횡행하는 낙관주의는 당연히 가짜이다. 오직 진정한 희망을 지참한 사람들만이 우리가 다가가는 지옥을 감히 직시할 수 있다. 이 책은 암담해져가는 현대에 적확하게 들어맞는 진실한 종교의 가장 뛰어난 고백서이다.
-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유고슬라비아의 철학자 겸 비판이론가)
이 책에는 소설들, 사회이론, 시, 철학, 문학이론, 역사, 드라마, 신학 같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폭넓은 지성과 유려한 필치로 전개되는 예지적 발상들이 넘쳐난다. 이글턴의 압도적이리만치 일관되고 위력적인 전망과 대단히 풍부하고 참신한 통찰들이 감동을 유발한다.
- 레이먼드 게스Raymond Geuss(브리튼 케임브리지 대학교 명예교수 겸 정치철학자)
근래 몇 년간 이글턴이 펴낸 저서들은 널리 읽히는 “필독서들”이었다. 희망을 다루는 신학저서들이 있지만 이클턴의 저서처럼 문학이론, 마르크스주의이론, 정치학, 신학을 원활하고 명민하게 횡단하는 저서는 없다. 이 책의 제4장은 빛나는 신학적 논설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희망해야 할 것 - 아직은 별로 많지도 않되 아예 없지도 않은 것 - 에 관한 매우 감동적인 에세이이다. 그리고 하여간 뭔가 있기는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의 차이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면서도 유일한 차이다. 이글턴은 바로 그런 까닭을 해명해준다.
- 데니스 앨런 터너Denys Alan Turner(브리튼의 철학자 겸 신학자)
해박하고 신중하며 유머러스한 거장의 풍모를 과시하는 테리 이글턴은 고대 그리스에서 오늘날에까지 6천여 년에 걸쳐 개념화되어온 (때로는 오인되어온) 희망의 개념을 낱낱이 해부한다. 그는 희망을 단순한 낙관주의, 명랑성, 욕망, 이상주의와도 구별하고 진보주의를 신봉하는 충심과도 구별한다. 그런 희망은 성찰과 헌신을 요구하는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명석한 합리주의에서 생겨나므로 실천과 자아수양을 통해 함양될 수 있으며, 좌절과 패배를 강요하는 현실들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현실들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진정한 희망은 명백하게 비극적인 것일지라도 이글턴은 그런 희망의 급진적 함의들을 찬성하는데, 왜냐면 “그런 희망은 영속혁명의 일종이고, 그래서 메타자연학적 절망이 그런 희망의 적敵이니만치 정치적 자만심도 그런 희망의 적”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희망은 현재를 저평가하지도 않고 과거를 삭제하지도 않으면서 미래를 직면하는 데 요긴한 수단이다. 수세기에 걸쳐 진행된 희망양상들에 관한 - 에른스트 블로흐의 기념될 만한 저서뿐 아니라 스토아철학자들,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크스, 키르케고르를 위시한 사상가들의 - 생각들을 명민하게 고찰하고 깊게 통찰하는 이 책은 종교적 신념과 정치이념뿐 아니라 악惡의 문제, 언어의 역할, 과거의 의미까지도 새롭게 조명한다. 이 책은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 세계에서 인간의 신념과 욕망을 탁월하게 조명하는 인상적인 연대기이다.
- 미국 예일Yale 대학교 출판부
▣ 작가 소개
저 : 테리 이글턴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로 맨체스터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세기와 20세기 영미문학을 연구하면서 문학의 이데올로기적 배후를 폭로하는 데 주력했던 그는 문화연구 쪽으로 방향을 틀어 왕성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동시에 영국 내의 좌파 조직에서도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대학 재학 중에 이미 가톨릭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사회·정치·문화론에 관한 글을 썼다. 그 후 구조주의 기호론, 정신분석학 등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독자적인 유물론적 문예론을 펼쳐나갔다. 서구사회에서 문학이 담당해온 역할에 다분히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문학이라는 대상의 이데올로기적 배후를 살피고 폭로하는 데 주력한다.
트리니티 대학, 캠브리지 대학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루이 알튀세의 영향을 받았으며, 슬라보예 지젝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고 학문의 세계를 여전히 넓혀나가고 있다. 2003년에 펴낸 『이론 이후』에서는 그간의 태도와 달리 문화이론과 문학이론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며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절대적인 것 거부를 비판하며 절대적인 것, 진리를 옹호한다.
주요 저술로는 『이성, 신앙, 혁명 : 신에 관한 논쟁 고찰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2009), 『삶의 의미』(2007), 『성스러운 테러』(2007), 『영소설』(2004), 『이론 이후After Theory』(2003), 『문화의 이념』(2000), 『포스트 모더니즘의 환상The Illusions of Postmodernism』(1996), 『미학의 이데올로기The Ideology of the Aesthetic』(1990), 『문학이론 입문』(1983) 등이 있다.
역 : 김성균
숭실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번역과 출판기획편집을 병행한다. 논문으로 「헤겔의 변증법적 이성과 인정투쟁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서구 자본주의 욕망에 대한 제3세계의 강박적 욕망과 그 전망」이 있고, 메타비평으로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 그래서 누가 더 많이 돌았는가?」,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왜 쓸쓸했는가?」, 「적대적 비판에 대한 고독한 냉소」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명상의 기술』, 『유한계급론』, 『낯선 육체』, 『자유주의의 본질』, 『테네시 윌리엄스』, 『바바리안의 유럽침략』, 『군중심리』, 『군중행동』, 『니체 자서전: 나의 여동생과 나』 『자살클럽』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서문
1장 낙관주의의 진부함
2장 희망이란 무엇인가?
3장 희망철학자
4장 희망에 대항하는 희망
번역자 후기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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