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아파트 창문을 막아선 오갈피나무
무성한 가지를 친다
웃자란 잎새들의
무절제한 생각들을 잘라내면
허공을 빨아들이는 뜨락이 열리고
익명의 도시가 환하게 눈을 뜬다
은폐된 거실의 하얀 벽들은
잠적한 속살을 나부끼고
부다페스트 소녀를 만나러 간
구슬픈 발자국들이 돌아온다
저마다 떨어져 나간 담론들이
시린 상처를 벗어던지고
아우성치는 여름을
다시 싱그러운 꿈으로 다독인다
-「가지치기」부분
이 시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특색도 앞에서 언급한 사물 주어와 의인화의 경향, 즉 존재론적 은유에 의해 발생하는 물활론적 세계관의 표현에 있다. 이것들은 사물에도 영성이 있음을 암시하면서 모든 존재들이 영성적 실체로 존재함을 주장하고 싶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시적 화자가 보여주는 지향적 가치로 사물의 몸집 줄이기, 또는 욕망의 덜어내기로 일컬어지는 작고 가벼운 것으로의 미끄러짐이다.
나의 욕망의 열기는 바야흐로 화씨 일백팔십 도, 밤이 깊어도 잠들지 않는다. 측정하지 못할 방향에서 흐린 모래바람은 휘몰아친다. 편서풍은 거센 돌풍을 일으키며 나의 모래판을 전도시킨다. 프로메테우스가 토해낸 검붉은 태양이 난폭한 불꽃을 피워내고, 뇌성벽력이 오아시스의 단란한 평화를 허문다. 피투성이의 길을 만드는 지친 땀방울,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해종일 옮겨놓는 발바닥은 풀포기 하나 거스르지 못하고 하늘의 비장한 눈망울을 뜨겁게 불태워버린다. 물기 머금은 뭉게구름은 아득하고 내 순결한 욕망을 에워싸는 거친 모래무지가 일체의 희망 한 자락 매몰시킨다. 항거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길, 모래가 산을 넘고 다시 바람은 모래를 잉태한다.
-「나의 타클라마칸」전문
무엇보다 이 시는 벗어날 길 없는 인간의 천형(天刑)을 보여주는 것 같아 문제적이다. 프로메테우스로 명명된 신의 세계 앞에서 인간은 구원을 얻을 길 없어 무한 방황과 방랑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고통과 굴레는 바로 “나의 욕망의 열기”때문에 발생하는 것임을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자각하고 있다. 세계의 거칠어짐과 난폭함은 바로 나의 욕망의 강도에 대응되어 일어난다. 그 점에서 문제적인 것은 욕망적 실체로서 나의 존재성이다.
시인의 말
이제부터 시작이다!
늘 배면에서 지켜주시는 뜨거운 손길에 대하여
깊이 감사드린다.
2017년 11월
해운대 우거에서 신선
작가 소개
저 : 신선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인제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 [시와의식]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등불 하나 가슴에 걸어두고』 『카오스의 저편』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봄의 현상학』과 산문집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아이들』 『나의 뜨락엔 그늘이 없다』가 있다. 한국시인협회,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부경예술대안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부산크리스천문인협회장 역임. [부산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목 차
제1부
우선멈춤 13
그림자 14
집 16
종이컵 18
가지치기 20
어떤 개인 날 3 22
어떤 개인 날 4 24
재래시장에서 26
빗방울 연주 28
아버지의 그늘 30
애드벌룬을 띄우며 32
베데스다 며칠 1 34
베데스다 며칠 2 36
봉숭아 물들이기 38
꽃의 디아스포라 40
제2부
여름의 끝 43
악보 44
티슈 1 46
티슈 2 48
프로메테우스의 눈 49
시루 속의 생 50
빈센트 반 고흐의 구두 1 52
빈센트 반 고흐의 구두 2 54
비망록 1 56
비망록 2 57
비망록 3 58
콘포지션 59
장어를 구우며 60
냉장고 62
군화를 신은 밤이 오고 있다 64
제3부
당신의 혜성 같은 67
알약 68
다시 희미한 계절은 오고 70
슬럼프 71
비 오는 날 72
지엠 씨의 하루 74
나의 타클라마칸 75
빨래를 말리며 76
컴퓨터 78
트렁크 79
아버지의 황토 80
밀라노 82
중동 통신 83
프라하 84
은산부락기 86
제4부
그믐의 끝 89
규장각에서 1 90
규장각에서 2 91
사우나 92
카드놀이 94
햇살론 1 96
햇살론 2 98
김포 가도 100
떠돌이 시편 1 102
떠돌이 시편 2 104
소멸을 꿈꾸며 106
멕시코 일몰 108
중독 109
프랑스 제과점 110
해설 | 구원의 시학 111
김경복(문학평론가·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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