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우리의 침묵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는 건
당신은 금방 눈치챌 수 있을 테고요
언어를 끄집어내는 비밀과 그 비밀을 숨기는 과정은
매일 밤 자라나는 흰 수염에 있다는 것도
금방 발견해낼 수 있을 테지요
어쩌다 애꾸눈을 만나기도 할 텐데요
그러면 그 애꾸눈 속에도 어떤 깊은
비밀이 숨겨져 있구나 보면 틀림없을 거예요
우리가 언제 무슨 해답을 구한 적이 있던가요
그건 무엇보다 당신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테고요
무해한 말이 주는 오해는 이미 터득했으니
우린 다만 깊은 침묵으로 우리 고양이
언어의 그물망을 즐길 따름이지요
-「침묵의 비밀」 중에서
언어를 연금술사처럼 다뤄야 할 시인에게 절실한 것은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해 언어의 암호와 비밀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독하는 것이다. 시인이 인내심을 갖고 고양이를 관찰하는 데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침묵의 틈새로 새 나오는” 고양이의 언어를 듣기 위해서다. 그 과정 속에서 혹시 “언어를 끄집어내는 비밀과 그 비밀을 숨기는 과정”을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빤빤한 비밀을 꽁지깃에 숨긴 공작아
화려한 꽁지 펼쳐 들기 전에 부릅뜬 눈으로 네 날개를 감시하라
어리석은 눈물 내보이기 전에 진실의 깊이로 너를 밝혀내라
-「비밀공작」부분
김자흔 시인의 시편들은 시적 대상으로서 고양이를 숭배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에서 그 진가를 드러내는 게 고양이의 존재이듯, 고양이가 지닌 숭고함은 인간 사회의 어두운 곳으로 숨어드는 반윤리적 타락한 것들의 전모를 꿰뚫어보고 그 위선과 위악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도저한 시적 윤리의 맥락에 맞닿아 있다.
이제 됐다! 깨끗이 돌아서는 순간
부패 냄새가 목구멍으로 매달렸다
허연 젤리 같은 것이 목구멍에서
쉴 새 없이 딸려 나왔다
진을 다 빼고 나서야 구토는 멈췄다
별러서 담근 게장은 구더기로 변질됐고
위선 따윈 절대로 믿을 게 못되었다
-「위악」부분
사랑의 형식에 구속된 채 서로를 구원하기는커녕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랑이 관성화되고 있는 데 대한 김자흔의 시적 성찰은 아집과 기만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유무형의 계약에 바탕을 이루는 사랑과 거리를 둔, 그래서 사랑하는 자들 사이의 ‘치명적 떨림’을 동반하는 정동(情動, affection)으로 나타난다. 이번 시집에서 고양이는 김자흔의 이러한 시적 성찰을 이해하는 근원적 심상이다.
시인의 말
열어놓은 통로로 몰래 찾아온 낮은 잠.
때마침 커튼 사이에서 부드럽게 놀라 팔랑이는 나비 한 마리.
나긋하고 침착하게
아무것도 아닌 듯 모든 일이 종결될 듯이 보일 때,
하얀 잠의 귓속을 가볍게 핥으며 거니는 또 작은 나비 한 마리.
속눈썹과 수염을 지나 미처 주고받을 화답도 없이 떠밀리는 계절의 그 짧은 통로에서
나는 약간 졸은 듯하다.
2017년 11월
김자흔
작가 소개
저 : 김자흔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숭의여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고장 난 꿈』이 있다.
목 차
시인의 말
제1부
나는 도도한 발톱이에요 13 침묵의 비밀 14 겸손한 비수 16 그건 오해의 수수께끼지 18 그녀와 고양이 모놀로그 20 이를테면 아주 경쾌하게 22 딸꾹, 철모르는 뉴스 24
0시의 고양이 26 비가(非歌) 28 장난 묘 은별 30 고양이 하녀 32 김꽃비 34 순명(順命) 36 출가 38
제2부
봄밤 時 43 그러할 연(然) 44 떨림, 새빨간 46 푸른 반역 48 소화불량증 50 그러한 묘연 52 흰 꿈의 이벤트 54 비밀공작 56 불언(不言) 58 다시 불면증 60 동굴나비 61 캄캄한 눈 62
제3부
나비/고양이 65 밤 거미 66 자각몽 67 낮은 경배 68 위악 70 흔들리는 경계 71그만큼의 교요 72 우호적 숨긴 말 74그냥 일상, 76 노루목 산장 이야기 77 늙은 거미 78 대관령의 파르티잔들 80 습윤 마을 82 독감 연금술 84
제4부
참 87 사랑니 88 외달도 90 퐁당퐁당 봄날 저녁이 92 경안동 순천추어탕 94 딸꾹, 구제 肉 96 대한 손님 98 때때로 엄마가 다녀가신다 100 당당 술래놀이 102 은밀함의 정점 104 혁명적이거나 게릴라적이거나 106 야생 봉침 108 비가(飛歌) 110 묘피지(猫皮紙) 111 이드적인 꿈 112
해설 시와 고양이의‘치명적 떨림_정동(情動)’ 113
고명철(문학평론가·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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