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누가 불을 놓은 거야?
붉은 꽃 심장 타오르네
어쩌지
콸콸 토해내는 저 핏빛
담수를
붉고 붉은 새떼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다겁(多劫)의 마차를 타고 지나가네
병처럼
깊어진 황홀
하릴 없이
눈물 같은 강가를 배회하다가
그 강가 끄트머리 어디쯤에서
매번 뛰어내리다가
미수(未遂)에 그치고 마는
-「간신히 석양 무렵」전문
이번 시집의 표제작인 이 작품에서 김수지 시인은 “병처럼/깊어진 황홀”의 까닭, 원인 아니 ‘정체’를 묻고 있다. 굳이 표제작이라는 상징성 때문만이 아니라, 시집에 수록된 작품 전체를 개괄했을 때도 이‘황홀의 정체’에 대한 물음이 이번 시집의 근간(根幹)으로 보인다. 이렇게 읽고 보면 마치 성공과 좌절의 대비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제했듯이 그것은 표면이고 시인의 ‘미수’는 “병처럼/깊어진 황홀”을 지향하는 것인데, 즉 ‘다겁의 마차’에 한 번 오르면 다시 내릴 수 없음을 알기에, “붉은 꽃 심장”처럼 매일의 ‘석양 무렵’에 불이 붙을 수 없음을 알기게 그 자체로 자연이고 하나의 경지(境地)라 할 수 있다.
뿌리를 자른 몸통에 칼집을 넣고
힘주어 쩌억 가른다
틈 없이 꽉 껴안은 몸 안에서
샛노란 웃음이 터지기 시작
자꾸만 파아하하, 파아하하
웃음꽃을 안에서 기르고 있었구나
푸른 겉대를 두른 웃음보따리
무르익은 웃음보따리
끌러서
알아서 하라는,
-「배추」 전문
치열한 시적 인식이 굳이 낮고 음습하고 칙칙한 것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런 색채를 덧칠한 것들이야말로 가짜일 확률이 높다. 위의 작품처럼, “틈 없이 꽉 껴안은 몸 안에서/샛노란 웃음이 터지기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아니 배추 몸통에 칼을 넣어 가르면서“샛노란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니 “웃음꽃을 안에서 기르고 있었구나” 깨달을 수 있는 귀와 눈과 마음을 가진 시인이야말로 치열한 시적 인식의 소유자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시인의 말
한동안
꿈속에서 절박함은 유지된 채
몸 따로 마음 따로,
한결같이 일치하지 않았고
언밸런스를 야기했다.
오랜만에
곤고한 내 잠의 꿈결을 더듬으며
이렇게라도 웃어본다.
2017년 가을
김수지
작가 소개
저 : 김수지
경기 안성에서 태어나 1996년 [열린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둥지를 떠난 새 한 마리』 『로드리그를 위한 기도』 『저녁 굶은 별들이 뒤란에 앉고』가 있다. 허균·허난설헌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한국문인협회, 인천문인협회, 굴포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 차
시인의 말
제1부
몸그릇 13
스무 살 14
나이테, 실종 16
간신히 석양 무렵 18
물병 하나 들고 20
어떤 가뭄 21
넝쿨장미 22
바우덕이 줄 타다 24
손가락을 베이다 26
수숫대 27
소리비 28
감기몸살 30
구름의 자손들 32
오래된 길 34
효재 36
팽이 38
제2부
코스모스 41
불통의 간극 42
바람의 낙서 44
그믐밤 46
차마 47
꽃양산 48
행방이 묘연 50
꽃무릇 52
배추 53
달팽이의 하루 54
마운트 쿡 56
몸이 기억한다 57
바리스타 58
담쟁이넝쿨 60
달의 경로 62
제3부
술래 65
꽃은 지는데 66
빈집 68
병상 70
어머니 71
일그러진 초상 72
목숨 꽃 74
엄마의 강 76
오후 3시 반 78
섬진강 79
보름달 80
아버지 82
입 84
산수유꽃 86
이불 88
토란잎 위에 90
제4부
파묵칼레 93
뼈대 있는 가문 94
씨앗 96
눈멀다 98
무구쵸 100
갑거장체 101
자화상 102
매미 소리 104
소래 어시장 106
풍장 108
허물 110
목동 근처 112
성장이 멈춘 114
그냥이라는 말 속엔 116
해설 | 배면(背面)의 간극(間隙)을 읽다 117
백인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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