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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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최재영
출판사항시인동네, 발행일:2016/07/06
형태사항p.146 A5판:21CM
매장위치문학부(1층)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91158962647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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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출판사서평

그 오래된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철학자 하이데거의 주장처럼 인간은 ‘불안’의 존재이다. 이 존재론적 불안은 인간의 유한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실상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인간적 가치 역시 유한성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무한한 존재라면 애써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추구할 이유가 없을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할 까닭도 없다. 인간적 가치란 유한한 시간과 기회 안에서 특정한 것에 에너지를 투여할 때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즉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자동적으로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인 것이다”라는 생물학자 조너선 실버타운의 주장을 듣는다고 ‘늙어감’에 대해 초연해질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최재영의 시에서 실존적 불안은 주로 죽음보다는 ‘늙어감’에 대한 경험으로 가시화된다. 이로 인해서 그녀의 언어는 불가역적인 물리적 세계의 시간법칙을 따르지 않고 현재 속에서 끝없이 과거, 특히 시간의 흘러감을 발견하려는 의식을 노출하게 된다.

휘적휘적 눈 깜짝할 새 당도한 기나긴 반백년
쉰, 이라는 문을 밀자
숨 가쁜 나날들 삐걱이는 무릎에 닿아
그동안의 행적을 굽어보는 것인데
격렬한 시간의 무늬 겹겹이 쌓여 있는 협곡마다
누구나 빛나는 한 시절 저장해두었을 테지만
생의 누추한 파문들 모두 무릎 근방에 몰려 있어
곧 시린 바람이 일 것 같다
잔뜩 녹이 슨 경첩처럼 뭉툭하고 못생긴 관절
이 깊은 틈새에서 불빛 하나 아득하게 깜박인다
그 어느 곳엔가 생에 두고두고 찾아갈 여각 한 채
나는 푸르른 등불을 앞세우고
숱한 저녁을 건너 이곳에 당도하였는가
시름시름 옛사랑을 추억하듯 걷고 있는가
허름한 변방도 등 기대면 그리움으로 남을 일이다
낯선 여각에 누워 기록하는 하루도
먼 날, 다시 내 간 길을 되짚어 돌아오고 싶을 것이다
돌아와 무심코 지나친 한때를 구석구석 둘러보리니,
시큰거리는 무릎이 보이지 않는 길들을 불러들인다
먼 곳으로부터 폭설이 찾아온다는 기별이다
?「여각(旅閣)」 전문

최재영의 시에서 시간의 단위는 ‘쉰’이고 그것은 정확히 ‘백년’의 절반이라는 실존적 · 심리적 방식으로 분절된다. 이러한 시간의식은 물리적인 시간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빨리 지나간 시간에 대한 의식이라는 점에서 심리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법칙은 이중화되어 있다. 인간은 시간의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시간은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흐른다. 이 후자의 시간을 심리적 시간이라고 말한다면, 심리적 시간이 실존적인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은 느리게 흘러갈 때보다는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껴질 때이다. 최재영의 시에서 실존적 시간의식으로서의 ‘백년’ 또는 ‘쉰’은 「백년」이나 「백년을 걷다」처럼 제목으로 드러날 때도 있고, 시적 진술에 그것을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드러날 때도 있다. 예컨대 “내 뜨거운 백년이 그렇게 지난다”(「백년」), “메마른 쉰이 먼저 달려든다” “청춘의 경작도 이렇게 간간하였을까”(「꽃피는 누옥」), “나는 회화나무보다 더 빠르게 늙어가네”(「회화나무」), “빠르게 스쳐 가는 청춘의 날들”(「도배」), “눈 깜짝할 새 지나는 꽃 시절일랑”(「오일 후」), “까만 씨앗을 가만 들여다보니/용광로처럼 들끓던 한 시절 고스란히 쥐고 있었던 것”(「과육은 평행선을 갖는다」), “혹은 백년의 간극을 탐독하느라/갈수록 틈새가 벌어지는 내 생의 구도에도/날이 저물고 한기가 몰아친다”(「폭설 5」), “내 안의 둥지들이 격렬한 바람 한 장씩 키우는 동안/빛나는 청춘들은 숲 한가운데를 관통해가고”(「숲과 새」), “껌벅이는 눈을 들여다보는 동안/몇 번의 계절이 왔다가고”(「폭설6」), “생은 비루하고 푸르른 젊음들은/쉽게 증발해버리기 마련이네”(「염전」), ‘산길을 걷는 동안 백년이 지나버렸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한 시절이 훌쩍 지나고”(「백년을 걷다」) 등처럼 수많은 진술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시인 자신이 청춘의 시간을 훌쩍 지나 늙어버렸다는 실존적 자각이다.
그런데 ‘늙음’에 대한 이러한 자각 이면에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인용 시에서 시인은 “휘적휘적 눈 깜짝할 새 당도한 기나긴 반백년”(「여각」)이라는 시간의 속도와 그것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남을 “생에 두고두고 찾아갈 여각 한 채”를 대비시킨다. 그는 낡고 못생긴 관절을 바라보면서 불현듯 자신이 ‘반백년’을 순식간에 살았음을 깨닫지만, 이 깨달음은 늙음에 대한 탄식이 아니라 “무릎이 보이지 않는 길들”이나 “이 깊은 틈새에서 불빛 하나 아득하게 깜박인다”처럼 희망적인 이미지로 연결된다. 최재영의 시가 시간의 빠른 속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들은 대개 이러한 정서로 귀결됨으로써 독특한 반복의 양상을 드러낸다. 하지만 최재영의 시에서 ‘늙음’을 매개로 드러나는 시간의식의 비중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즉 시인의 시적 문법이나 시의 출발점 자체가 전적으로 ‘늙음’에 대한 자의식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재영의 시적 특징을 이해하는 데는 이 자의식이 어떤 세계와 대상으로 확장/연결되는가를 살피는 일이 한층 중요하다.

창가의 목련이 흔들린다
이쪽을 기웃거리다 나와 마주치자
슬며시 외면해 버리는,
그 파문에 나도 잠시 흔들렸던가
목련의 한 시절이 내게 물들어
모두 북쪽으로만 가고 있나니
내 발걸음도 자연스레 북(??)으로 향할밖에,
봄볕 몇 줌에도 꽃들의 좌우명은 바뀌나니
바람의 먼 기별에도
나는 자꾸만 눈물샘이 젖어들었으니
내 안의 그늘진 폐허도 한 번은 화들짝 피어날 것이니
나의 짧은 몇 걸음이
네게는 천 년을 견디는 일이어서
피고 지는 주어들도 한 계절을 걷는 일이어서
봄날을 건너가는 그의 잔잔하고 기인 호흡이
얼룩처럼 어룽지는 몇 날
목련 안쪽의 세상을 내 더 이상 알 수 없으나
떨어지는 날들도 한 생일 것이니
지금 막 눈 맞추는 순간이
너와 나의 평생이다
이리 뜨거운,
? 「목련 1」 전문

최재영의 시는 전형적인 서정시이다. 그녀의 시는 자연적인 대상-세계와의 관계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도시적 · 일상적 삶에 근거한 서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시인의 일상이나 시적 의도에 대해 판단할 수는 없지만 시집 전편에 걸쳐 자연적 대상과의 관계가 모티프로 기능한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시적 태도가 의도의 결과라고 읽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실제로 최재영의 시는 실존적인 불안이나 지독한 자기성찰이 있을 뿐 세속적인 욕망이나 노동의 세계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 그녀의 화자는 자연과 풍경의 변화에는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최재영의 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 자연적 세계에 대한 재발견 혹은 번역으로서의 묘사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자연적 서정, 특히 최재영 시에서 자연적 서정의 궁극적 지향점은 묘사를 위한 묘사, 발견을 위한 발견이 아니다. 여기서의 자연은 절대적 거리 바깥에 놓인 예찬의 대상이 아니다. 최재영의 자연적 서정시는 인용 시처럼 자연적인 대상-세계를 감정투사를 통한 동일시의 대상으로 간주하거나, 또는 자연적 질서와 시인 자신의 일상적 삶을 평행하게 놓음으로써 이 관계 자체를 성찰의 계기로 전유한다. 「목련 1」은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화자는 지금 창가에서 목련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런데 “봄날을 건너가는 그의 잔잔하고 기인 호흡이/얼룩처럼 어룽지는 몇 날”이라는 진술로 미루어 짐작컨대 지금 목련의 상태는 절정을 지나 특유의 누런 색깔을 드러내면서 시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화자는 그 풍경을 지켜보면서 “목련 안쪽의 세상”을 알 수는 없지만 “떨어지는 날들도 한 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정으로 피어 있는 순간만이 생(生)은 아니라는 이 감각은 늙음이나 죽음에의 불안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청춘의 것이 아니다. ‘쉰’이라는 심리적·실존적 시간의식은 여기에도 투영되어 있다. 그리하여 창가에서 흔들리는 목련을 보며 화자는 “그 파문에 나도 잠시 흔들렸던가/목련의 한 시절이 내게 물들어”라고 진술하거나, “지금 막 눈 맞추는 순간이/너와 나의 평생이다/이리 뜨거운,”이라는 발견을 통해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목련-되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목련-되기’가 결국 “떨어지는 날들도 한 생일 것이니”라는 운명애(amor fati)로 귀결됨으로써 자기성찰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자연적 서정, 그리고 이러한 시적 성찰 속에서 자연은 결국 인간 실존의 한 영역일 따름이다.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다
봄 그늘에 앉아
무심한 바람이 둥글 퍼지고
향기로운 햇살 몇 줌 도르르 구르는 것을 지켜보다
그 아득한 멀미 속을 헤매다가
끓어오르는 절정들을 그만, 복사하다
꽃의 이마는 늘 신열에 휩싸였으므로
뜨거움 속에서 종종 길을 잃다
매번 허탕만 치고 돌아오는 길은
무수한 통점이었느니,
돌아보니 폭풍처럼 지나왔노라고
지나온 길은 단숨에 지워졌노라고
꽃이 닫히는 시점 또한 눈멀고 말아
모든 찰나는 숨 가쁜 적요에 들다
하여 천 년을 피어 있어도 순간이라 기록하다
한나절 봄볕이 붉게붉게 소멸해 가다
그리고 진실에 눈뜬 자들은 이윽고 말하다
봄은, 오늘 또 몇 번의 허구를 재촉하였는가
꽃들이 기울어가는 봄날을 탁본하여 후일을 도모하다
다시 처음인 듯,
?「꽃이 말하다」 전문

자연을 실존적으로 전유하는 서정시의 화법은 화자와 대상 간의 거리를 소멸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 경우 화자의 목소리와 대상의 목소리는 사실상 협화음으로 겹쳐져 발화된다. 그러므로 이 시의 제목인 ‘꽃이 말하다’를 시인 또는 ‘화자가 말하다’로 바꿔 읽을 수도 있다. 이‘화자=꽃’의 목소리 등식에 따라 ‘꽃’의 음성에는 ‘화자’의 목소리가, ‘화자’의 목소리에는 ‘꽃’의 음성이 이미-항상 중첩되어 있다. 화자는 그늘에 앉아 바람이 뒹굴고 향기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불현듯 끓어오르는 봄기운을 ‘복사’하고 만다. 그것은 꽃의 이마를 뜨겁게 만들던 신열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화자는 그 복사로 인해 자신이 뜨거움 속에서 길을 잃거나 무수한 고통의 시간을 지나왔다고 진술하고 있다. 산문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화자는 절정에 이른 봄꽃의 기운처럼 뜨겁게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도처에 흩어져 있는 ‘통점’을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가 꽃의 언어로 번역하고 있는 이것은 “돌아보니 폭풍처럼 지나왔노라고/지나온 길은 단숨에 지웠노라고”라는 진술처럼 고통의 시간은 길었으나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그 시간이 무척 짧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실존적 시간의식에 기대어 화자는“천 년을 피어 있어도 순간이라 기록하다”라고 쓰고 있다.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다”라는 진술에 개입되어 있는 감각 또한 이 시간의식에서 기원한 것이다. ‘허구’란 결국 ‘거짓말’을 뜻하는 것이니, 지나온 세월은, 청춘이라는 이름의 절정은 거짓말처럼 지나가 버렸다는 의미일까. 하지만 마무리 장면에서 목격되는 화자의 심정은 후회나 아쉬움이 아니다. “봄들이 기울어가는 봄날”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늙음’이라는 존재론적인 감각과 이어지며, 따라서 “봄날을 탁본하여 후일을 도모하다”라는 진술에는 새로운 ‘허구’의 시간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시는 “출렁이는 노래는 다시 부를 수 없어요/파도를 후렴처럼 끌고 다니던 생의 구비”(「관목(貫目)」)나 “아무리 들춰봐도 재생되지 않는 시절들”(「도배」)에서 드러나는 아쉬움의 정서와는 확연히 다르다.

밤새 천둥번개가 요란하였다
내밀한 필력을 자랑하는 꽃들이
허공에 몇 점 획을 찍는 아침
말 못할 천기를 예감하였을까
누군가는 하늘의 전언을
필사하느라
지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도도하고 정교한 문장을 틔우는 중이다
바람의 어수선한 틈을 놓치지 말 것
두려움과 초조함을 감추느라
혹자는 애써 꽃받침을 활짝 열어젖힌다
오래전부터 그들은 세상의 징후를 기록하였던 바,
기록에는 별다른 기교가 필요치 않다며
담장 밑 그늘만을 꼼꼼히 채록하기도 한다
개화는 이미 밀서가 아닌 평서(平書)인 것
그러므로 꽃들은 쉽사리 서체를 내놓지 않는다
형형색색 눈부신 필력을 드러내기까지
그 미궁을 빠져나오는 데 평생이 걸릴 것이다
꽃들은 비밀을 간직한 두려움으로 몸을 연다
일필휘지 내리긋는 격렬한 몸놀림
새로운 필경사가 피어났다는 소식이다
?「필경사 2」 전문

최재영의 시세계에서는 ‘자연’도 글을 쓴다. 시인은 자신의 삶에서 글쓰기가 차지하는 가치, 즉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 대한 자각이나 성찰에 에너지를 쏟듯 자연적 대상들이 만들어내는 문자와 기호를 독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자연적 세계 자체를 거대한 텍스트로 간주하려는 이러한 태도가 결국 자연에 대한 개성적인 묘사로 이어지는 것이니, 시인은 “길 잃은 세작들은 올해도/앞다투어 강물의 내력을기록하는 중이다”(「섬진강」)이나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왕조의 최후를/해마다 피고 지는 꽃들에게서 읽는다”(「꽃의 비밀」) 등처럼 세계를 읽어야 할 문장으로 감각한다. 이러한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까만 씨앗을 가만 들여다보니/용광로처럼 들끓던 한 시절 고스란히 쥐고 있었던 것”(「과육은 평행선을 갖는다」)이라는 표현처럼 대상의 형상 또한 하나의 기호이다. 가령 인용 시에서 화자가 ‘꽃’을 대면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화자는 요란한 천둥번개가 지나간 아침에 생명력을 잃지 않고 피어 있는 꽃들을 목격한다. 그런데 화자에게 그 장면은 생명작용이 아니라 “내밀한 필력을 자랑하는 꽃들이”(「필경사2」)라는 표현처럼 언어행위로 느껴진다. 어떤 꽃은 “가장 낮은 자세로/도도하고 정교한 문장을 틔우는 중”이고, 어떤 꽃은 “두려움과 초조함을 감추느라” “애써 꽃받침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런데 화자는 이 장면을 마냥 긍정할 수 없다. 그것은 오랫동안 “세상의 징후를 기록”해온 꽃들이 “기록에는 별다른 기교가 필요치 않다”고 “밀서가 아닌 평서(平書)”를 고집하면서 “서체를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화자에게 이날 아침의 개화에는 “형형색색 눈부신 필력”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화자는 이 불완전한 상태를 “꽃들은 비밀을 간직한 두려움으로 몸을 연다”라고 표현하고, 수직으로 내리는 빗방울을 맞고 꽃들이 개화하는 장면을 가리켜“새로운 필경사가 피어났다는 소식”이라고 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필경사’라고 말해야 했을까? 그것은 화자가 꽃의 “내밀한 필력”을 “하늘의 전언을 필사”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재영의 시에는 자연은 한낱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시선으로 읽어야 할 텍스트이고, 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독해를 향해 열려 있는 무한한 잠재성의 세계이다. 최재영의 시는 이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 자연에 대한 새로운 독해방식이 곧 서정의 한 가능성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말]

두 번째 시집이다.
자연에 연고를 둔 것들,
시의 행적은 그 푸른 체적을 온전히 감당해내는 쓰디쓴 유희일 것,
어쩌면 나의 본적은 詩와의 은밀한 거래를 주선하는 내륙 어디
쯤일 것,
바람이 오가는 길목처럼 쓸쓸하지만 그런대로 견디는 즐거움 또
한 적지 않다.
시를 쓰는 행위, 일상처럼 공기처럼 평안함이 되기를……
그리하여 스스로가 시가 되기를 열망하는 기원에서 나는 출발
했다.

▣ 작가 소개

저자 : 최재영
경기 안성에서 태어나 2005년 《강원일보》 《한라일보》 신춘문예와 200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루파나레라』가 있으며, 〈방송대문학상〉을 수상했다. E-mail: bjhyi@hanmail.net

▣ 주요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폭설 _ 13
파미르 한 줄기 _ 14
폭설 2 _ 16
폭설 3 _ 18
섬진강 _ 20
목련 1 _ 22
바닷가 재봉틀 _ 24
필독서 _ 26
꽃이 말하다 _ 28
관목(貫目) _ 30
자작나무 숲에서 _ 32
백년 _ 34
필경사 2 _ 36
꽃의 비밀 _ 38

제2부
경계 _ 43
목련 2 _ 44
킬링필드 _ 46
새들의 저녁 2 _ 48
역병 1 _ 50
역병 2 _ 52
단추 _ 54
꽃피는 누옥 _ 56
내시 _ 58
문신 2 _ 60
복사꽃 아래 저녁 _ 62
유산 _ 64
스노 볼 _ 66
회화나무 _ 68
유배지에서 _ 70

제3부
능소화 _ 75
붉은 섬 _ 76
미로 _ 78
도배 _ 80
오일 後_ 82
청동 숲 _ 84
자미원역 _ 86
빗살무늬 _ 88
떠도는 부족 _ 90
과육은 평행선을 갖는다 _ 92
폭설 4 _ 94
폭설 5 _ 96
처용을 찾아서 _ 98
꽃, 아찔한 _ 100

제4부
숲과 새 _ 105
가난한 벽화 _ 106
말[馬] _ 108
근심 _ 110
뿌리 _ 112
폭설 6 _ 114
여각(旅閣) _ 116
낙타 2 _ 118
널뛰기 _ 120
새 _ 122
염전 _ 124
백년을 걷다 _ 126
회화(會話) 혹은 회화(繪畵) _ 128
호미 _ 130

해설 그 오래된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_ 133
/ 고봉준(문학평론가)

작가 소개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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